[명시 산책] 임솔아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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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벤치>

by 브린니 2022. 4. 28.

벤치

 

 

 

이 벤치에서 두 사람과 헤어졌다.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이 여기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이 벤치를 지날 때마다 둘 중 한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다.

 

​오늘은 햇빛이 한 사람의 정수리를 통과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늘도 없다.

오늘은 빗방울이 한 사람의 무릎을 통과하고 있다. 그래 우리 그만하자.

 

​사람을 통과한 비를 나는 만질 수 있다.

오늘은 여기 없는 다른 한 사람이 손끝에 있다.

한 나뭇잎은 허옇게 마른 그대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다른 한 나뭇잎은 허옇게 마른 그대로

멀리 사라져버린다. 죽은 채로 떨어져 내린 나뭇잎을 일일이 셀 수는 없다.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덧칠을 하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사라짐을 경험한다.

 

​그래 우리 그만하자는 말 좀 그만하자.

 

우리는 앉을 곳을 빼앗긴다.

너무 오래 비어 있는 의자는 누군가 맡아놓은 자리 같고

미안하지도 않아서 미안함은 너무 오래간다.

―임솔아

 

 

【산책】

 

 

공간이나 그 공간의 사물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이미 흘러가 여기에 없다.

그 장소에 머물던 시간은 머릿속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추억 속에서,

그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현실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 두 사람 모두 있거나 두 사람 모두 없지 않고, 늘 한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한 사람씩 사랑을 한다.

 

둘 중 한 사람만 나를 기다린다.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곤 하지만.

 

 

 

 

두 사람 중 하나가 나타나서 벌이는 추억의 반복은

그만 하자는 말과 함께 끝난다.

 

사랑이 끝나고

추억도 끝이 난다.

 

벤치는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앉을 곳이 없다.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벤치는 추억에만 있는 것일까.

그땐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

사람만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앉았던 벤치도 그러하단 말인가.

 

현실에서 멀쩡히 있는 벤치가

추억 속에서 사라진다.

 

아니,

시간 속에서 사물이 소멸하고

장소 사라지는 것일까.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덧칠을 하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사라짐을 경험한다.

 

사람처럼 장소나 사물도 다른 시간에서는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시간이 있고, 다른 장소와 사물이 있다.

 

 

사랑하던 사람과 걷던 길이나

자주 같던 장소는 잊을 수 없다.

 

그 길에 놓인 벤치

꽃이 핀 나무 아래 벤치

낙엽이 수북이 쌓인 벤치

비에 젖은 벤치

눈이 내려 하얀 이불을 덮어쓴 벤치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그 벤치를 보면

거기 앉아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곁에 그때 그 사람이 함께 앉았으면 싶다.

 

추억 속에서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 떠난다.

그런데 결코 내 곁에 앉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라진 사람, 그는 누구일까.

그가 옆에 없는 이상

더 이상 벤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빼앗긴, 누군가 맡아 놓은 다른 사람을 위한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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