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치
이 벤치에서 두 사람과 헤어졌다.
다른 시간에 다른 사람이 여기에 앉아 나를 기다렸다.
이 벤치를 지날 때마다 둘 중 한 사람이 여기에 앉아 있다.
오늘은 햇빛이 한 사람의 정수리를 통과하고 있다. 그에게는 그늘도 없다.
오늘은 빗방울이 한 사람의 무릎을 통과하고 있다. 그래 우리 그만하자.
사람을 통과한 비를 나는 만질 수 있다.
오늘은 여기 없는 다른 한 사람이 손끝에 있다.
한 나뭇잎은 허옇게 마른 그대로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
다른 한 나뭇잎은 허옇게 마른 그대로
멀리 사라져버린다. 죽은 채로 떨어져 내린 나뭇잎을 일일이 셀 수는 없다.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덧칠을 하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사라짐을 경험한다.
그래 우리 그만하자는 말 좀 그만하자.
우리는 앉을 곳을 빼앗긴다.
너무 오래 비어 있는 의자는 누군가 맡아놓은 자리 같고
미안하지도 않아서 미안함은 너무 오래간다.
―임솔아
【산책】
공간이나 그 공간의 사물은 그대로인데 시간은 이미 흘러가 여기에 없다.
그 장소에 머물던 시간은 머릿속 추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추억 속에서,
그 추억이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현실 같은 시간에,
한 장소에 두 사람 모두 있거나 두 사람 모두 없지 않고, 늘 한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할 수 없듯이
시간의 차이를 두고
한 사람씩 사랑을 한다.
둘 중 한 사람만 나를 기다린다.
그 한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뀌곤 하지만.
★
두 사람 중 하나가 나타나서 벌이는 추억의 반복은
그만 하자는 말과 함께 끝난다.
사랑이 끝나고
추억도 끝이 난다.
벤치는 그대로 있는데
우리는 앉을 곳이 없다.
우리가 앉을 수 있는,
사랑할 수 있는,
벤치는 추억에만 있는 것일까.
그땐 있었는데 지금은 없는 것이
사람만이 아니고.
그 사람이 앉았던 벤치도 그러하단 말인가.
현실에서 멀쩡히 있는 벤치가
추억 속에서 사라진다.
아니,
시간 속에서 사물이 소멸하고
장소 사라지는 것일까.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덧칠을 하고
한 사람에 대해서는 매일 사라짐을 경험한다.
사람처럼 장소나 사물도 다른 시간에서는 없어지거나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있고, 다른 시간이 있고, 다른 장소와 사물이 있다.
★
사랑하던 사람과 걷던 길이나
자주 같던 장소는 잊을 수 없다.
그 길에 놓인 벤치
꽃이 핀 나무 아래 벤치
낙엽이 수북이 쌓인 벤치
비에 젖은 벤치
눈이 내려 하얀 이불을 덮어쓴 벤치
시간이 많이 흐른 뒤
그 벤치를 보면
거기 앉아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내 곁에 그때 그 사람이 함께 앉았으면 싶다.
추억 속에서 누군가 내 곁에 앉았다 떠난다.
그런데 결코 내 곁에 앉지 않는 사람도 있다.
사라진 사람, 그는 누구일까.
그가 옆에 없는 이상
더 이상 벤치는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빼앗긴, 누군가 맡아 놓은 다른 사람을 위한 벤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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