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예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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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예보>

by 브린니 2022. 4. 24.

예보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오늘 날씨 좋다.

 

 

​―임솔아

 

 

【산책】

 

 

임솔아의 시는 사람을 불편하게 한다.

왜일까?

 

매우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표현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는 철저한 마이너 감성이 시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닌 것으로 바라볼 뿐이 아니라 거기에 숨은 어떤 것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Something is Noting!

어떤 것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기존의 의미와 가치를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고,

기존에 아무것도 아닌 것 별 것 아닌 것이 사실은 어떤 것을 지니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이 의미나 가치라기보다는 어떤 진실이다.

 

의미나 가치가 전혀 없더라도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끝내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지구가 사실은 지옥이라고.

그래서 어떤 의미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렇다고,

그게 진실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뭘 어쩌겠다는 것도 아니다.

진실이라서 그것을 사람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고!

그래서 사람들은 그 진실 때문에 불편하다!

 

 

임솔아의 시를 읽는 것은 진실을 마주하지만 그 진실이 아주 불편하기에

임솔아의 시에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최소한 우리가 시를 읽을 때 흔히 느끼는 익숙한 감동은 결코 아닌 것이다.

임솔아의 시는 마음을 움직인다. 그래서 그것을 감동이라고 부른다면 그렇다.

불편한 감동?

그런 게 있다면 그렇다.

 

실재.

있는 것 같지만 없고, 없는 것 같지만 있다.

진짜 있는 것. 그러나 진짜 없는 것. 그러나 진실 그 자체인 것.

임솔아의 시는 세상의 뒷면, 사람의 안쪽, 보이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하는 것.

그것의 진실을 말한다.

 

임솔아의 시는 임금님이 벌거벗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불편하다.

사람들은 모두 임금님이 벌거벗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는 것은 불편하다.

임금님이 보이지 않는 화려하고 숭엄한 옷을 입었다고 말하고, 그렇게 맹신하는 것이 편하다.

편한 것이 좋다.

그것이 아름답다.

 

그러나 임솔아는 끝내 아니라고 말한다.

참 불편한 시인이다.

 

 

나는 날씨를 말하는 사람 같다.

봄이 오면 봄이 왔다고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전한다.

이곳과 그곳의 날씨는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그래서 날씨를 전한다.

 

참 아무것도 아니다. 두 번 말할 필요가 없는 시적 언술이다.

A는 A이고, B는 B이다.

그런데 A는 B와 같고, 그러나 둘은 다르다.

그래서 A는 A라고 말하고 B는 B라고 말한다.

날씨는 날씨다.

 

 

그런데,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에도 내게 새로운 날씨가 도착한다.

이곳은 얼마나 많은 날씨들이 살까.

날씨 이야기가 도착하는 동안 날씨가 도착한다.

 

날씨를 말하는 순간(언어) 새로운 날씨(존재)가 도착한다.

날씨 이야기도 하나의 실재인데 그냥 날씨도 실재다.

언어와 존재가 충돌하면서 새로운 것을 빚어낸다.

그러나 실재는 여전히 없다. 혹은 없는 것 같다.

 

의미나 가치가 없다.

날씨에 그런 게 있는가.

 

과연 날씨라는 것 자체가 있는 것일까.

비가 오고, 바람 불고, 흐리고 구름 낀 것이 있을 뿐!

 

 

날씨처럼 성격이나 인성 따위도 과연 있는 것일까.

뙤약볕이 떨어지는 운동장과 새까맣게 우거진 삼나무 숲과

가장자리부터 얼어가는 저수지와 빈 유모차에 의지해 걷는 노인과

종종 착한 사람 같다는 말을 듣는다.

못된 사람이라는 말과 대체로 같고 대체로 다르다.

나의 선의는 같은 말만 반복한다. 미래 시제로 점철된 예보처럼 되풀이해서 말한다.

선의는 잘 차려입고 기꺼이 걱정하고 기꺼이 경고한다. 미소를 머금고 나를 감금한다.

 

앞의 날씨에 관한 언술과 비슷한 패턴이 반복되고 있다.

인성이나 성격이 좋다는 말을 듣는 것과. 못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같거나 다르다.

그것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 좋고, 무엇이 못된 것이냐를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내가 이런 말과 행동을 하면 사람들은 착하다고 하고.

반대로 하면 나쁘다고 한다.

나는 이럴 때 있고, 저럴 때도 있는데 어떤 것이 진짜 나의 모습일까.

 

진실은 누가 알까?

내가 혹은 남이? 아니면 둘 다 모르는 나의 진짜 본모습은 어디 있을까?

 

 

창문을 연다. 안에 고인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을 창밖으로 민다.

 

창문을 열면, 밖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일까?

최소한 창문을 열면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내보낼 수는 있다.

그래서 시인은 안에 있는 것을 밖으로 밀어낸다.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들”.

 

왜 날씨가 안에 고여 있을까?

날씨란 집밖에 있는 것 아닌가. 물론 빛이 비춰들기도 하고, 밖의 날씨가 안에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안에 고여 있는 날씨란 무엇일까?

 

그것은 나의 내면에 들어 있는 밖의 시선이나 말과 행동이 아닐까.

세상의 시선과 말, 행동들이 나의 내면에 날씨처럼 쌓여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날씨는 맑고 투명한 것이 아니라, 괴괴하다.

 

착한 사람들도 밖으로 밀어낸다.

왜냐하면 착한 사람이 나의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인은 괴괴한 날씨와 착한 사람이란 상반된 것들을 모두 다 밀어낸다.

둘 다 불편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으로 이 시를 읽는 사람들은 이미 들어와 있는 것들,

세상이 내게 불어넣은 많은 이미지, 환상, 강박관념, 선입견, 편견들을 내보내지 못한다.

그것들이 이미 지금의 나를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버릴 수 없다.

그런데 시인은 버린다.

그래서 독자는 불편하다.

 

시인은 나쁜 것(괴괴한 날씨), 좋은 것(착한 사람들) 모두 버린다.

진실은 그 어느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 버리고 나면 뭐가 남는가.

 

그래서 사람들은 못 버리고, 모두 짊어지고 산다.

상처 아픔 고통 다 움켜쥐고 산다.

 

그런데 어느 날 창을 열고 버리는 날이 꼭 오고야 만다.

아니, 그래야 한다.

 

텅 빈 심연, 텅 빈 내면, 텅 빈 진실, 텅 빈 실재.

텅 빈 것이 나를 새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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