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김선재 <담장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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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김선재 <담장의 의지>

by 브린니 2022. 4. 18.

담장의 의지

 

 

신발을 돌려놓으면 누군가 들어왔다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

 

우리가 발을 맞춰 같은 말을 되풀이할 때

기대가 기대온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안으로 나가려는 사람과 밖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서로를 밀어낼 때

이제 막 시작되는 날씨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풍경이 쪼개진다면

싫다고 말해도 괜찮을 텐데

 

쓰는 순간 사라지는 구름과

소리 내면 지워지는 물방울 사이에서

 

공을 굴리는 아이들은 굴릴 만큼 굴리고 나서야 돌아갔다 다 자란 꽃을 주울 때마다 바닥이 드러났다 틈만 나면 틈이 되었다 속삭이기 좋았다

 

그늘을 지운 담장도

그늘이 되기에 좋고

 

입술을 깨물면 배고픔이 덜하다고 했다

깨문 자리마다 입술이 피어났다

 

벽이 되는 손자국을 따라

무성한 것들은 다 비밀이어서

 

악수를 나누면 돌아서야 한다

 

바깥이 아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서로의 입술이 문질러 지우니

 

고요했다

 

 

김선재

 

 

 

산책

 

흰 벽에 흰 색 크레용으로 꽃을 그리면 무엇이 나타날까.

 

캄캄한 밤에 어둠이 짙어지면

밤이 검어지는 것일까,

어둠이 깊은 밤이 되는 것일까.

 

불타오르는 불 속에서 붉은 불과 파란 불은 어떻게 구별할까.

불을 만져볼까, 볼 속으로 들어가 앉아 볼까.

파란 불은 차가운 불일까.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

 

안으로 나가려는 사람과 밖으로 들어가려는 사람

 

그늘을 지운 담장도

그늘이 되기에 좋고

 

입술을 깨물면 배고픔이 덜하다고 했다

깨문 자리마다 입술이 피어났다

 

바깥이 아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안과 밖이 하나도 이어진 세상 뫼비우스의 띠

 

안으로 들어갈수록 밖으로 빠져나오고,

밖으로 나가려 해도 안으로 들어와 앉는,

 

휘어진 동그라미의 세상,

비뚤어진 완벽한 세상,

기울어진 평등한 세상,

 

이런 세상에서 살면 사랑과 미움도 하나로 엮어 있어서

담장과 담장이넝쿨처럼 담장과 넝쿨을 떼어놓을 수 없어서

배신과 용서도 안과 밖처럼 이어져 있어서

 

동전의 양면이 아니라 양가감정이 아니라

어느 것이 사랑인지 어느 것이 미움인지

어떤 것이 배신이고 어떤 것이 복수인지

서로가 서로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고 있어서

 

배가 고파서 먹는 것이 음식인지 제 입술인지 알 수 없는,

 

상처가 곪아 터져서 그 상처가 피부가 되고 살이 되고,

입술이 되는

 

 

 

이 시의 마지막 연은 어느 입체파(혹은 추상파) 화가의 키스를 떠오르게 한다.

 

 

바깥이 아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서로의 입술이 문질러 지우니

 

고요했다

 

 

담장이 그늘이 만들고

안이 밖을 만들고

깨문 입술이 새로 돋아나고

들어오고 나가는 풍경들이 반복되지만

 

아예 담장과 그늘을 안과 밖, 사랑과 미움을

서로의 얼굴을 지우는 일이 가능하다면

 

세상은, 아니 사람의 마음은 엄청나게

고요할 것이다.

 

 

 

이 시는 신선한 표현들로 가득 차 있다.

 

신발을 돌려놓으면 누군가 들어왔다

 

이런 표현은 상상할 만 하지만 들어온 사람이

안에도 없지만 밖에도 없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안에도 밖에도 없는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하는 경계선 사람? 

 

들어오려고도 하지 않고,

나가려고도 하지 않는 고집센 사람. 

 

아직 들어오지 않았으나 곧 들어올 사람? 

아직 나가지 않았으나 곧 나갈 사람? 

 

그래도 신발을 거꾸로 돌려놓으면 들어오는 사람

그(그녀)는 누구일까? 

 

안으로 나가려는 사람과 밖으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서로를 밀어낼 때

이제 막 시작되는 날씨

 

사랑하는 두 사람이 어떤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거나 할 때

그리고 그 말과 행동이 사랑을 더 깊어지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밀어낼 때

 

그것은 정당하거나 옳은 것이 아니라

뒤집어진 것이다.

 

안으로 나갈 수 없고,

밖으로 들어갈 수 없기에.

 

이제 막 시작되는 날씨

 

왜 날씨가 시작되는 것일까.

날씨는 이제까지 없다가 다시 시작하는 것일까.

아니면 날씨가 바뀌는 것에 대한 표현일까. 

 

날이 흐리면 어떤 기분인가

비가 또 내리면,

눈이 오거나

햇살이 투명한 날은 어떤 느낌인가.

 

날씨는 매일 반복되지만 날씨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널을 뛴다.

 

좋다고 말하지 않아도 풍경이 쪼개진다면

싫다고 말해도 괜찮을 텐데

 

날씨처럼 풍경 역시 그렇다.

날씨에 따라 기분이 달라지는 것처럼

풍경 역시 좋고, 싫고가 있지만

기분이 달라져도 날씨는 그대로이듯

사람의 좋고 싫고가 풍경을 바꿀 수 없다.

 

날씨와 풍경은 사람의 마음에 때론 소용돌이와 회오리를 불러오지만

사랑은 변하지 않고, 반복되면서 계속된다.

 

 

 

 

벽이 되는 손자국을 따라

무성한 것들은 다 비밀이어서

 

악수를 나누면 돌아서야 한다

 

만지는 것들은 모두 벽이 된다.

손마저도 벽이 된다.

 

벽이 된 손으로 악수를 하고 돌아선다.

 

비밀은 간직한 채

이별이 오는가.

 

아니면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는가.

 

첫사랑이 끝나고 두 번째 사랑이 시작되고,

한 사람이 가고

다른 사람이 온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다.

 

 

바깥이 아니어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없는

서로의 입술이 문질러 지우니

 

고요했다

 

안과 밖

사랑과 미움

배신과 복수

 

대립하는 모든 것들을 지우면

대립이 아니라 원래 같은 것들

그것마저 다 지우면

 

고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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