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 갇힌 꿈, 닫힌 방의 끝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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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기형도, 갇힌 꿈, 닫힌 방의 끝은...

by 브린니 2021. 10. 17.

시인 기형도는 1960년에 태어나 1989년에 죽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에 세상을 떠났다. 종로의 한 심야극장에서 뇌졸중으로 숨진 채 발견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참 말이 많았다. 젊디젊은 나이에 갑작스런 죽음이었으니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하였다.

 

일각에서는 그 극장이 심야에 게이들이 모이는 극장이라 하여 기형도에게 은밀한 비밀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프레임을 씌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유고시집 <<잎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위험한 가계.1969>를 보면 그가 열 살 때 이미 아버지가 중풍, 즉 뇌졸중으로 여러 해 동안 앓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의 병으로 인해 기울어진 가계는 어머니와 공장에 다니는 누이가 겨우겨우 지탱해 가고 있었다.

 

학교 월말고사에서 상장을 받고 반장을 할 정도로 영특한 시인은 담임선생님께 가정방문을 오지 말라고 부탁한다. 열 살 기형도는 상장을 접어 개천에 종이배로 띄운다.

 

이어 연이은 죽음들이 가정에 닥친다. 가계에 부담이 되어도 아버지가 먹는 알약은 절대로 줄이지 않던 어머니의 노력에도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불의의 사고로 누이도 죽는다. 폭설이 내리던 해에는 삼촌도 죽는다.

 

<삼촌의 죽음ㅡ겨울 판화4>라는 시에서 기형도는 “그때까지 나는 사람이 왜 없어지는지 또한 왜 돌아오지 않는지 알지 못하였다”라고 쓰고 있다.

 

죽음과 가난의 청소년 시절을 지나 연세대학교에 입학한 기형도는 <대학 시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돌층계 위에서

나는 플라톤을 읽었다, 그때마다 총성이 울렸다.

목련철이 오면 친구들은 감옥과 군대로 흩어졌고

시를 쓰던 후배는 자신이 기관원이라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교수가 있었으나 그분은 원체 말이 없었다.

몇 번의 겨울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이었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1980년대에 20대를 보낸 시인에게 현실은 가혹했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그때 친구들은 시위를 하다가 감옥으로 가거나 피하듯 군대로 갔다. 존경하던 교수도 현실에 대해서 입을 다물어야 생존할 수 있던 시대였다. 그때 시인은 플라톤을 읽었다고 한다.

 

시인들은 본성상 다른 세상을 꿈꾸는 자들이다. 삶을 초월하고 생과 사를 넘어 본질적 존재의 참된 의미를 추구하고 이상적인 존재의 발현이란 어떤 것인지 탐구하는 자다.

 

그런 시인에게 민주화 투쟁의 총성이 울리는 현실은 가혹하다. 현실 문제에 뛰어들지 않는 지성인의 마음은 착잡하다. 플라톤의 이데아를 탐구하는 시인에게 졸업 후의 현실, 대학을 떠난 다음의 현실은 두려운 것이다.

 

기형도는 불행하게도 신문사 기자가 된다. 신문사 기자는 사회 현실을 보도하는 사람이다. 그가 직면하는 현실은 고통스럽다.

 

그의 시 <홀린 사람>을 보면 정치인들의 모습과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신랄하게 등장한다. 사회자가 정치인을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으로 소개하며 하늘을 걸고 맹세하면서 눈물을 흘리면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그 중에 누군가가 그분에게 묻는다. “당신은 신인가” “당신은 유령인가” 그러자 성난 사회자가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라고 소리친다.

 

기형도가 기자로서 정치인들의 작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로 이렇다. 그들은 신도 유령도 아니면서 사람들을 홀린다. 그에 대해 어떤 질문을 할 경우 미치광이가 된다.

 

기형도는 천생 시인이다. 그는 자기 자신조차 관찰하는 사람이다. 시인들은 이 세상을 살되 이 세상 너머를 보는 이들이므로, 자기 자신조차 이 세상 너머의 눈으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 기형도에게 현실은 더욱 끔찍하다. 이상과 사랑, 자유와 아름다움으로 대표되는 덕스러운 이데아의 세상과는 다른 현실의 비참함이 그의 시적 기조에 저변을 이루고 있다.

 

많은 연구자들이 기형도가 민주화 투쟁의 80년대와 러시아 붕괴로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무너진 후 허무함에 빠진 90년대의 비관주의 사이에 놓여있다고 말한다.

 

80년대 민주화와 노동운동의 가열찬 희망은, 투쟁에서 승리하면 괴물 같은 자본주의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지만, 러시아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승리를 뜻했고 세상은 자본과 결탁한 정치적 세력의 힘과 돈으로 굴러갈 것이라는 의미였다.

 

물론 시인은 그 투쟁에서도 한 발 물러나 있었고, 어쩌면 그 투쟁이 궁극적으로 꿈꾸는 존재의 구원과 자유란, 삶과 죽음을 넘어서야만 하는 이데아 세계에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 그나마 이 땅에서 조금이라도 나은 삶이 될 수 있다면, 하고 바라는 소망은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힘은 더욱더 강해졌고 사람들은 건물과 공장에 갇혔으며 소외된 계층은 겁탈을 당해도 객사를 해도 세상은 무관심하다.

 

그런 세상을 가장 잘 묘사하는 시로 정평이 나 있는 <안개>라는 작품에서 보면,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끼어 있고, 공장으로 여공들이 출퇴근을 한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중략)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한밤중에 여직공이 기숙사와 가까운 곳에서 겁탈을 당해도 아무 말도 할 수 없도록 입이 막힌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이다. 취객이 얼어죽어도 무관심하다. 그는 그저 쓰레기 더미쯤으로 취급된다. 그리고 그 불행은 안개의 탓이 아닌 개인적인 불행으로 여겨진다.

 

이곳이 바로 안개의 성역이며, 안개는 세상을 가리고 있는 가림막이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진실을 보지 못하거나 진실을 가린다. 그래서 안개는 그곳을 대표하는 명물이며, 누구나 조금씩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세상은 이처럼 사람들의 위에 서 있다.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이지만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사람들을 겁탈하거나 쓰레기 취급한다. 그런 세상을 유지하는데 사람들은 일조하고 있다.

 

시인은 이러한 세상 속에 살아가면서 지친다. 지쳐서 늙었다고 생각한다. 또 살아온 삶이 헛되다고 생각한다. 다음은 <물 속의 사막>의 한 부분이다.

 

장맛비, 아버지 얼굴 떠내려 오신다

유리창에 잠시 붙어 입을 벌린다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

우수수 아버지 지워진다, 빗줄기와 몸을 바꾼다

아버지, 비에 묻는다 내 단단한 각오들은 어디로 갔을까?

번들거리는 검은 유리창, 와이셔츠 흰빛은 터진다

미친 듯이 소리친다, 빌딩 속은 악몽조차 젖지 못한다

물들은 집을 버렸다! 내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자신의 삶이 헛되고 헛것을 살았다고 느낄 만큼 생은 무의미하고 절망적이다. 그의 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보면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눈여겨볼 것은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가 장맛비로 와서 시인이 선 건물의 창문을 적시는 비로 흐른다는 것이다. 장맛비 속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떠내려 와서 입을 벌린 채 무엇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물이 된 아버지는 시인에게, 세상에게 무엇을 전해주고 싶은지도 모르지만 빌딩들은 젖지 않고 살아있는 사람들의 눈 속에는 물들이 살지 않는다.

 

죽음을 건너 간 세계 속에서 아버지는 이 땅의 헛된 삶들에게 무언가를 전해주고 싶지만 전해지지 않는다.

심지어 사람들은 살아있는 서로에게조차 관심이 없다.

 

시인은 <어느 푸른 저녁들>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낮은 소리들을 주고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람들은 서로를 통과해 간다. 그것은 삶의 습관이며 익숙한 일이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저 하루를 동일하게 살아간다.

 

장맛비 속에서도 소리치는 죽은 자들의 외침이나 신비한 이상적 세계의 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이 무관심의 딱딱한 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살아가는 일상을, 사람들도 좋아서 그렇게 살아가는 게 아니다. 시인은 어느 눈 내리는 밤 관공서의 유리창 너머로 본 한 사람의 눈물을 잊지 못한다.

 

<기억할 만한 지나침>이라는 시를 읽어보자.

 

그리고 나는 우연히 그곳을 지나게 되었다

눈은 퍼부었고 거리는 캄캄했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물들은 눈을 뒤집어쓰고

희고 거대한 서류 뭉치로 변해갔다.

무슨 관공서였는데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유리창 너머 한 사내가 보였다

그 춥고 큰 방에서 서기는 혼자 울고 있었다!

눈은 퍼부었고 내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침묵을 달아나지 못하게 하느라 나는 거의 고통스러웠다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중지시킬 수 없었다

나는 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창밖을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나는 우연히 지금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밤은 깊고 텅 빈 사무실 창밖으로 눈이 퍼붓는다

나는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 오는 밤 건물 하나가 통째로 희고 거대한 서류 뭉치로 변할 만큼 일 더미에 파묻혀 말단 공무원인 서기는 혼자서 울고 있다.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가 돌아가는데 그 서기는 한 개의 작은 나사일 것이다. 야근에 시달리는 그는 사람이라기보다 우는 나사다.

 

어느 공장에서 어느 회사에서 누군가가 밤새 그렇게 울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나마 그것조차도 자리가 없어 어느 음식점에서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생 누군가가 그렇게 눈 오는 깊은 밤에 울고 있는지 모른다.

 

시인은 그 눈물을 중지시킬 힘이 없다. 너무나 고통스럽지만 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 울음이 그칠 때까지 추운 창밖에서 떠나지 못하고 있어주는 것밖에 없다. 당사자는 시인이 바라보고 있는 줄도 모르겠지만...

 

시인은 그 사내를 어리석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인은 삶의 책임의 무게를 알기 때문이다. <추억에 대한 경멸>이라는 시에서 “이봐, 책임질 밤과 대낮들이 아직 얼마인가”라고 쓰고 있다.

 

삶은 그렇게 책임져야 할 일들로 돌아가지만 그 자체가 인간을 억압하는 눈물로 기계처럼 돌아가기에 시인에게 삶은 절망적이다.

 

그 안에서 낙오되고 버려지는 삶들에 대해 시인의 촉각은 예민하다. <죽은 구름>이라는 시에서 처절하게 묘사된 죽음과 절망이 드러난다.

 

구름으로 가득 찬 더러운 창문 밑에

한 사내가 쓰러져 있다,

......

비닐백의 입구같이 입을 벌린 저 죽음

......

그러나 우울하고 추악한 맨발 따위는

동정심 많은 부인들을 위한 선물이었으리

......

두 명의 경관이 들어와 느릿느릿 대화를 나눈다

어느 고장이건 한두 개쯤 이런 빈집이 있더군,

이따위 미치광이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와 죽어갈까

더 이상의 흥미를 갖지 않는 늙은 개도 측은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빈 집의 더러운 창문 밑에서 한 사내가 죽어 있다. 그 죽음은 마치 검은 비닐봉지처럼 입을 벌린 누추한 죽음이다.

 

사내의 맨발은 동정심 많은 부인들이 자기만족적인 한 푼 어치의 동정을 주기에 매우 적절한 선물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자인 우아하고 부유한 부인들의 동정과 기부에 대해 시인의 시니컬한 태도가 드러난다.

 

경찰관들마저 이런 부랑자들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늙은 개에게도 두려움을 주지 못한 무가치한 죽음!

 

그러나 시인은 그 사내의 죽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사내의 인생은 더러운 창문과 같으며 죽음으로 떠나간 사내의 본질은 결코 창문의 것이 될 수 없는 구름과 같은 것이다.

 

“아무도 모른다, 저 홀로 없어진 구름은

처음부터 창문의 것이 아니었으니”

 

사람들은 그 사내를 빈 집에서 객사한 미치광이로 볼 것이다. 그러나 시인은 빈 집에서 객사한 미치광이라는 그 인생은 더러운 창틀과 같다고 본다. 떠나간 그의 영혼, 혹은 존재의 본질은 처음부터 그 더러운 창틀로 규정지어질 수 없는 구름과 같은 자유로운 것이었기에 저 홀로 사라졌다.

 

기형도에게 구름은 안개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안개는 이 땅의 진실을 가리는 더러운 권력과 힘, 인간 세계의 거짓을 의미하지만 구름은 자유롭고 구속이 없으며 어디에나 머물 수 있고 또 떠나갈 수 있다. 구름은 누구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본질적인 것이며 산 자와 죽은 자의 영혼이다.

 

또한 구름은 물이 되어 장맛비로 아버지의 얼굴을 품고 내려온다. 겨울이 되어 추워지면 그 물은 고드름이 되어 창밖에 매달린다.

 

<이 겨울의 어두운 창문>이라는 작품을 읽어보자.

 

어느 영혼이기에 아직도 가지 않고 문밖에서 서성이고 있느냐. 네 얼마나 세상을 축복하였길래 밤새 그 외로운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느냐

.......

어차피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

너 사나운 영혼이여! 고드름이여.

 

고드름은 누군가의 영혼이며 가지 못하고 문밖에서 서성이면서 세상을 축복하는 천형을 견디며 매달려 있다. 세상을 축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을 지니기에 고드름은 사나운 영혼이다.

 

시인의 영혼 역시 사납다. 이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고 이 세상의 불행을 모른 척하지 못하고, 눈 오는 추운 밤에도 홀로 서서 바라보고 바라보며, 세상의 눈물을 중지시킬 수 없는 자신의 한계를 절망하며 사납게 한탄한다.

 

삶에의 열망이 절망을 겪으면 죽음에의 열망으로 변화한다. “우리 모두 허물어지면 그뿐, 건너가야 할 세상 모두 가라앉으면 비로소 온갖 근심들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인은 이미 자신이 삶에 지쳤으며 늙었다고 생각하고 절망적인 삶에서 죽음 너머를 꿈꾼다.

 

이제 기형도 시인의 대표시인 <빈 집>을 살펴볼 차례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라는 구절은 수많은 시인 작가들에 의해 재사용되었고, 사랑에 빠졌다가 이별을 경험하는 문학 청년들의 경구였으며, 누구라도 공감할 만한 기형도 시인의 대표 문구가 되었다.

 

실제로 기형도 시인이 연애 경험의 실패로 이 구절을 썼을지도 모른다. 많은 시인 작가들이 사랑과 이별은 글쓰기의 추동력이 된다고 하니 그 정도로 이해하는 것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여러 가지 시들을 살펴보며 마지막에 이 시를 바라볼 때, 보다 더 깊은 인식으로 들어가게 된다.

 

사랑은 삶을 살게 하는 에로스적 정열이다. 욕망은 삶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힘이며 살고자 하는 충동이다. 그러나 그 사랑을 잃으면 에로스는 죽음 충동인 타나토스로 변하며 그것은 타인 살해나 자기 살해로 나타난다.

 

타인도 자기도 살해할 수 없는 이성적 자아는 타나토스를 해결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찾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쓰는” 행위이다.

 

글을 쓰면서 자기를 객관화하고 자기 충동을 관찰하여 그 추동력을 언어로 내뱉으면서 카타르시스를 경험하며 죽이거나 죽고자 하는 욕망을 해소한다.

 

그런데 이 시에서 시인은 해소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대로 그 죽음 충동을 가지고 갇히려 한다. 문을 잠그고 스스로 갇히며 밤과 안개와 촛불, 그리고 눈물과 종이들에게 잘 있거라, 하며 안녕을 고한다.

 

멈추지 않고 절망의 극한까지 걸어가면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강에 닿는다. 거기에서 시인은 늘 죽음을 옆에 끼고 시를 썼다.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 드리운 죽음의 그림자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민주화 투쟁의 총성 속에서 쓰러져간 젊은이들의 죽음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소련의 붕괴와 함께 죽어간 이데올로기의 죽음도 영향을 미쳤을 테고, 가열찬 투쟁으로 점철된 1980년대 시대의식의 죽음 또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무엇보다 총성을 들으면서도 탐독했던 플라톤의 이데아를 향한 추구, 인간 존재의 한계를 넘어선 이상세계에 대한 전망도 죽음 너머를 바라보는데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리고 서른 살에 기형도는 실제로 죽었다. 믿기지 않는 죽음, 갑자기 심야 영화관에서 뇌속의 혈관이 터져 죽는 죽음...

 

기형도가 죽은 다음에 남은 단 한 권의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은 전설이 되었고, 천재 시인의 요절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그러나 그의 시집 ‘시작 메모’에서 나는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한다.

 

“나는 한동안 무책임한 자연의 비유를 경계하느라 거리에서 시를 만들었다.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나는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다.”

 

이 말처럼 그는 건물과 공장으로 점철된 길거리에서 발견하는 모든 고통에 천착하였다. 하지만 그것은 그가 살아간 시대 속에서 유일하게 그가 할 수 있는 양심적 행위였다.

 

만약 그가 조금 더 조용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무책임하지 않게 가장 위대한 잠언인 자연을 노래할 수도 있었을까?

 

그가 노래할 자연의 위대한 잠언이 나는 몹시도 궁금하고, 이제 다시는 그 언어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그가 더 오래 살아서 중년의 나이가 되었다면, 이십대에 비와 고드름과 구름에서 죽은 자들의 넋이 하는 소리를 들었던 그 신비한 감각으로 자연이 나누는 신성한 대화를 듣고 우리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을까.

 

그렇게 할 수 없던 시대에 살았던 그는 살기를 중단하였고 자연 속으로 들어가버렸다. 그의 아버지가 빗물로 창밖에서 입을 벌렸던 것처럼, 객사한 늙은이가 구름으로 떠나간 것처럼, 기형도 그의 영혼도 저 떨어지는 낙엽 중 하나로 바스락거릴지 모른다. 곧 다가올 겨울엔 밤눈이 되어 내릴지도 모른다.

 

아무도 옷을 입혀주지 않았던 사납고 고요한 밤을 살았던 그가 눈이 되어 허공 속에서 자꾸만 춤을 추며, 살아서는 아무에게도 줄 수 없었던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지 않을까.

 

그의 시 <밤눈>을 읽으며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네 속을 열면 몇 번이나 얼었다 녹으면서 바람이 불 때마다 또 다른 몸짓으로 자리를 바꾸던 은실들이 엉켜 울고 있어. 땅에는 얼음 속에서 썩은 가지들이 실눈을 뜨고 엎드려 있었어. 아무에게도 줄 수 없는 빛을 한 점씩 하늘 낮게 박으면서 너는 무슨 색깔로 또 다른 사랑을 꿈꾸었을까. 아무도 너의 영혼에 옷을 입히지 않던 사납고 고요한 밤, 얼어붙은 대지에는 무엇이 남아 너의 춤을 자꾸만 허공으로 띄우고 있었을까. 하늘에는 온통 네가 지난 자리마다 바람이 불고 있다. 아아, 사시나무 그림자 가득 찬 세상, 그 끝에 첫발을 디디고 죽음도 다가서지 못하는 온도로 또 다른 하늘을 너는 돌고 있어. 네 속을 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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