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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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기본>

by 브린니 2022. 4. 29.

기본

 

흰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내일의 약속을 위해서

옷가게에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흰 티셔츠끼리

모여 있었다. 가슴에는 주머니가 없거나 있었다.

옆 가게에도 들어갔다. 흰 티셔츠가 다른 티셔츠와

무더기로 쌓여 구겨져 있었다.

구겨진 옷은 조금 더 저렴했다.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기본 티는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죠. 점원이

 

말했다. 흰 티셔츠를 찾아다니다 집에 있는

흰 티셔츠가 기억났다.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집으로 돌아와

 

옷장 서랍을 열어보았다.

흰 것들을 모두 꺼내보았다.

흰 티셔츠는 저마다 다른 얼룩을 갖고 있었다.

 

쪼그리고 앉아 얼룩에다 치약을 묻혀

비볐다. 지워지고 있는 얼룩을 이목구비가 허옇게 바래가는

폴라로이드 사진처럼 오래 지켜보았다

 

지워지는 얼룩은

지워졌고 지워지지 않는 얼룩은

지워지지 않았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가장 자주 입어 가장 쉽게 얼룩이 졌다.

 

탈수된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탁탁 털었다. 창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가

펄럭거렸다. 말라가면서 옷은 더 환해졌다. 내 방에는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갔다.

내일은 약속이 있다.

 

 

―임솔아

 

 

【산책】

 

얼룩이 묻는 새 옷은 단지 얼룩이 묻었을 뿐 여전히 새 옷일까.

얼룩이 묻은 옷은 아무리 새 옷이라고 해도 결국 얼룩진 옷일까.

 

인생도 지울 수 없는 얼룩이 생긴다면 망한 인생일까.

이번 생은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 이렇게 여기며 결국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잘 살아 보려고 얼룩진 인생을 닦고 빨고 문지르면서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그는 모르는 걸까.

이번 생은 이미 망한 생이라는 것을.

 

 

얼굴 없는

마네킹은 어떤 옷이든 잘 어울렸다. 내 얼굴에

잘 어울리는 티셔츠를 찾아다녔다.

 

패션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했던가.

얼굴이 없으면 옷을 옷 그대로 옷이 되지만

거기 얼굴을 얹으면

옷은 어울리는 옷이 되거나

어울리지 않는 옷이 된다.

 

얼굴 때문에 옷이 멋지거나 볼품 없어진다.

옷이 멋지고 폼나는 것일까. 아니면 얼굴이.

 

못생긴 얼굴은 못난 옷을 만나야 하는 것일까.

못생긴 얼굴이 아름다워지려면 어떤 옷을 걸쳐야 하는 것일까.

 

얼굴 때문에 멋내는 걸 포기하고 늘 같은 옷만 입는다.

기본만 하자.

그래서 흰 티셔츠만 늘어질 때까지 입고 다닌다.

 

내일 약속인데 흰 티셔츠를 입고 나가려고?

무슨 약속일까.

그냥 기본만 하면 되는 약속인가.

그 따위 약속이란 도대체 뭘까.

 

 

탈수된 티셔츠를 세탁기에서 꺼내어

탁탁 털었다. 창가에 걸어두었다. 티셔츠가

펄럭거렸다. 말라가면서 옷은 더 환해졌다. 내 방에는

얼굴 없는 빨래들의 환한 냄새가 퍼져갔다.

내일은 약속이 있다.

 

옷은 결국 빨래가 된다.

옷과 빨래는 어떻게 다른가.

 

그냥 옷과 한 번 빨아서 말린 옷은 어떻게 다른가.

새 옷과 입던 옷과 헌 옷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은 어떤 옷일까.

 

빨아도 보송보송하게,

빨아도 하얗게 빛나는,

빨아도 새 옷 같은,

빨면 빨수록 더 정감이 가는,

 

사람도 그럴까.

낯선 사람이 가장 매혹할까.

오래 된 포도주 같은 사람이 좋을까.

 

한 번 헤어진 뒤 다시 만난 연인이 애틋할까.

모든 걸 잊고 새롭게, 처음 만난 사람이 더 나을까.

 

사람 다를 게 없다는데

사람도 흰 티셔츠처럼 기본만 하면 될까.

 

기본은 뭘까.

인생은 어떻게 기본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나는 기본은 하고 사는 사람일까.

어디에나 있는,

어디에 있어도 잘 어울리는,

하얗게 빛나는,

 

그런 인생!

한번쯤 살아보고 싶다.

 

얼룩졌으나 없는 듯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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