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임솔아 <모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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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임솔아 <모래>

by 브린니 2022. 5. 11.

모래

 

 

오늘은 내가 수두룩했다.

스팸 메일을 끝까지 읽었다.

난간 아래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물방울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떨어지라고 응원해주었다.

내가 키우는 담쟁이에 몇 개의 잎이 있는지

처음으로 세어보았다. 담쟁이를 따라 숫자가 뒤엉켰고 나는

속고 있는 것만 같았다.

술래는 숨은 아이를 궁금해하고

숨은 아이는 술래를 궁금해했지. 나는

궁금함을 앓고 있다.

깁스에 적어주는 낙서들처럼

아픔은 문장에게 인기가 좋았다.

오늘은 세상에 없는 국가의 국기를 그렸다.

그걸 나만 그릴 수 있다는 게 자랑스러워서

벌거벗은 돼지 인형에게 양말을 벗어 신겼다.

돼지에 비해 나는 두 발이 부족했다.

빌딩 꼭대기에서 깜빡거리는 빨간 점을

마주 보면 눈을 깜빡이게 된다.

깜빡이고 있다는 걸 잊는 방법을 잊어버려

어쩔 줄 모르게 된다.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혼자였던 것일까.

 

 

―임솔아

 

 

【산책】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가시나무>라는 가요는 이렇게 노래한다.

 

내 속에 내가 얼마나 많아야 내가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그냥 나일까.

의사들은 내 12개쯤 있으면 정상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한다.

 

내 속에 내가 12개까지는 정상.

13개부터는 자아분열? 다중인격?

 

<아이덴티티>라는 영화에서도 정말 많은 정체성이 충돌을 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모래처럼 많다면?

셀 수가 없을 정도라면?

 

내 속에 내가 너무나 많아 당신이 들어올 자리가 없다고 말하는 가시나무,

내 속에 정말 많은 가시가 있어서 당신이 들어오면 찔려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수數,

내가 몇 개인지,

담쟁이 잎이 몇 개인지,

나의 발과 동물의 발의 개수가 몇 개씩인지,

 

수는 언제나 중요하다.

어떤 것의 기준이 수로 정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수와 친숙할 뿐만 아니라

수는 우리를 괴롭힌다.

수는 우리의 머리를 복잡하게 하고,

어떤 상황에서 경우의 수를 셀 때 정말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내가 나를 어떤 존재로 인식할 때

내가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그것 자체로도 인식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둘 이상?

12개, 13개라면?

 

 

사실 내가 정말 누구인지 제대로 아는 것은 그 자체로 쉽지 않은 일이다.

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없고, 다른 누구처럼 느껴질 때

 

늘 혼자 있는데

내가 다른 곳에, 다른 시간에 있는 내가 느껴진다면?

 

오늘은 내가 무수했다.

나를 모래처럼 수북하게 쌓아두고 끝까지 세어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말은 얼마나 혼자였던 것일까.

 

넌 혼자가 아니야.

그것은 타인과 함께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내가 많은 것은 슬픈 일이다.

우리에겐 타자가 필요하다.

 

거부할수록 내가 많아지고, 타인은 없다.

고독하다는 것은 내가 나를 세고 있을 때 하는 말이다.

 

밖으로 나가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한다.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사람을,

나에게 갇힌 사람을 나르시스라고 부른다.

 

나르시스라는 이름은 곧 죽을지도 모를 만큼

망연자실에 빠져 있는 사람을 뜻한다.

 

 

모래 장난을 하며 놀던 어린 시절이 있다.

모래성을 세우고,

모래 위에 글씨를 쓰고,

두꺼비집을 만들고.

 

모래 놀이를 할 때

혼자서 노는 어린 아이가 있고,

둘이나 혹은 몇 명이 어울려

모래 장난을 하는 아이들도 있다.

 

혼자서 모래 놀이를 하는 고독한 아이.

혼자 있다는 것처럼 아픈 것도 없다.

 

그러나 고독하고 아프다고 해서 나를 또 하나 만들어서는 안 된다.

친구를 불러와야 한다.

 

내 속엔 내가 하나뿐이어야 한다.

둘부터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어야 한다.

 

integrity :

an undivided or unbroken completeness or totality with nothing wa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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