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이병률 <아무것도 아닌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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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이병률 <아무것도 아닌 편지>

by 브린니 2021. 5. 5.

아무것도 아닌 편지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적인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 움큼 쏟아놓은 어느 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 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 채라도 지어 올리기를 바라자며 내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이병률

 

 

【산책】

 

어느날 시인에게 감옥으로부터 편지가 온다.

어느 죄수에게서 면회를 와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에 쓰인 이름은 시인이 아니라 딴사람이다.

그래서 편지를 돌려보낸다.

 

대신 마음으로 축복을 한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그 사람은 이제 죄수가 아니라

사랑이 많고, 그리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편지는 다시 시인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시인은 그 죄수가 출감한 것으로 믿기로 한다.

 

그리고 시인은 다시 기도한다.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 채라도 지어 올리기를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시인은 모든 것을 마음으로 해결한다.

시인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마음뿐이니까.

 

그를 위해 이렇게 시를 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시쓰는 것뿐이니까.

 

 

잘못 배달된 편지가 있다.

이전에 살던 사람에 온 편지이거나

주소나 이름을 잘못 쓴 편지가 있다.

 

 

하지만 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

 

 

편지봉투에 쓰인 이름은 다르지만 이 편지는 시인에게 배달되었다.

편지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수신인이다.

 

이 편지는 분명 꼭 받아야 할 사람에게 배달되었다면

편지를 받은 시인은 지금 당장 교도소로 달려가 죄수를 면회해야 한다!

 

시인이여, 행동하라!

사랑의 시를 쓰기 전에 달려가 죄수를 만나라!

 

시인이여,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라!

시 쓰기 전에.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요청에 얼마나 응답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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