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편지
어느 먼 지방 우체국 사서함번호가 적인 편지가 배달되었네
면회를 와달라는 어느 감옥에서 보낸 편지
봉투엔 받는 이의 이름만 다를 뿐 버젓이 내 집주소가 적혀 있었네
오래 책상 위에 올려둔 알지 못하는 이의 편지
화분이 편지봉투 위로 마른 꽃잎들을 한 움큼 쏟아놓은 어느 날
새 봉투에 또박또박 그의 주소를 적고 편지를 밀어 넣고 풀칠을 하였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며칠 뒤 편지는 나에게로 되돌아왔네
그가 출감한 것으로 치자며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 채라도 지어 올리기를 바라자며 내 감옥의 자물쇠들을 흔들어보네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이병률
【산책】
어느날 시인에게 감옥으로부터 편지가 온다.
어느 죄수에게서 면회를 와달라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에 쓰인 이름은 시인이 아니라 딴사람이다.
그래서 편지를 돌려보낸다.
대신 마음으로 축복을 한다.
이 편지를 되받는 이는 누구인가
사랑이 참 많은 사람이어서
들판이나 강가에서도 물살처럼
또 어느 먼 곳에서도 터벅터벅 그리워할 줄 아는 사람일런가
그 사람은 이제 죄수가 아니라
사랑이 많고, 그리움을 아는 사람이 된다.
하지만 편지는 다시 시인에게 되돌아오고 만다.
시인은 그 죄수가 출감한 것으로 믿기로 한다.
그리고 시인은 다시 기도한다.
마음에서 꺼낸 못으로 집 한 채라도 지어 올리기를
과도한 세상이 다시 그를 결박하지 않기를
그가 더 이상 모두를 미워하지 않기를
시인은 모든 것을 마음으로 해결한다.
시인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것은 따뜻한 마음뿐이니까.
그를 위해 이렇게 시를 쓴다.
시인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시쓰는 것뿐이니까.
★
잘못 배달된 편지가 있다.
이전에 살던 사람에 온 편지이거나
주소나 이름을 잘못 쓴 편지가 있다.
◆
하지만 편지는 반드시 목적지에 도착한다.
◆
편지봉투에 쓰인 이름은 다르지만 이 편지는 시인에게 배달되었다.
편지가 목적지에 도착했다면 그 편지를 받은 사람이 수신인이다.
이 편지는 분명 꼭 받아야 할 사람에게 배달되었다면
편지를 받은 시인은 지금 당장 교도소로 달려가 죄수를 면회해야 한다!
시인이여, 행동하라!
사랑의 시를 쓰기 전에 달려가 죄수를 만나라!
시인이여, 당신의 사랑을 표현하라!
시 쓰기 전에.
★
우리는 누군가의 도움 요청에 얼마나 응답하는가!
'독서 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거의 하늘을 떠나 > (0) | 2021.05.23 |
---|---|
[명시 산책] 장승리 <디테일> (0) | 2021.05.11 |
[명시 산책] 조용미 <불안의 운필법> (1) | 2021.05.02 |
[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1) | 2021.05.01 |
[명시 산책] 신해욱 <이렇게 추운 날에> (1) | 2021.04.2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