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조용미 <불안의 운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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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조용미 <불안의 운필법>

by 브린니 2021. 5. 2.

불안의 운필법

 

 

불안하고 또 불안한 내면을 가졌으리라 짐작되는 이 사내.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여 늘 마음이 들끓거나 지나치게 고요하였으리라 여겨지는 이 사내의 그림 한 점과 글씨를 직접 보았던 날 나는 사내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는 나를 그의 글 앞에 아주 오래 세워두고 마음껏 어떤 알 수 없는 고통과 희열에 열중하게 했다 그날 이후 서화를 보거나 한가하게 혼자 앉아 있을 적이면 사내의 글과 그림보다 그의 내면에 소용돌이치며 지나갔을 어떤 물결이나 바람 같은 것이 더 궁금하였다

 

매화와 사내의 글씨가 인쇄된 천으로 된 커다란 가방을 두 해 가까이 방의 벽에 걸어두고 보았지만 그 사내에 대한 쓸데없는 기록을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 그에 대한 궁금증이 깊어가도 애써 알아보지 않은 점도 돌이켜보니 괴이하다

 

瘦金體라 불리는 가늘고 야윈 획을 구사한 그의 서체는 붓을 멈추거나 꺾었던 흔적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 예민했던 그의 눈길이나 손놀림을 따라가보며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했지만 그 어지러운 마음 뒤에 한참을 더 한참을 더 한적해지는 고운 일도 있었다

 

사내의 단지 뼈대만 남아 있는 신경질적인 운필법이 나의 몸 어딘가와 친밀하게 마주 보려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글과 그림에 탐닉했던 북송의 황제였던 이 사내는 어떤 이들에겐 나라를 멸망으로 이끈 무능하고 치욕적인 왕으로만 보인다고 하니

 

내가 늘 바라보는 것은 사내의 뒷모습, 팔굉을 두루 관람하고 사해를 다 밟아보지 못하더라도 생각의 폭을 넓힐 수는 있을 것이다 어찌 보아야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사내와의 만남은 그저 이러하였다 내가 잘 모르는 그 사내는 徽宗으로 불린다

 

―조용미

 

 

★ 수금체瘦金体

송대(宋代) 휘종(徽宗) 조길(趙佶)의 서체. 필세가 가늘지만 힘찼음.

 

★ 휘종徽宗 (1082~1135)

중국(中國) 북송(北宋)의 제 8대 황제(黃帝). 신종(神宗)의 아들. 1100년에 즉위(卽位).

취미(趣味)와 도교(道敎) 신앙(信仰)에 빠져, 정치(政治)를 돌보지 않아 반란(叛亂)이 일어났으며, 1125년에 금(金)나라가 침입(侵入)하여 퇴위(退位), 1127년에 포로(捕虜)가 되어 그 후(後) 만주(滿洲) 오지(奧地)에서 죽음. 시(詩)ㆍ서(書)를 잘했음. 특히 그림에서는 산수화조(山水花鳥)에 뛰어나, 대가를 능가하였고 화원(畫院)을 설치(設置)하여 많은 화가(畫家)를 양성(養成), 원체화(院體畫)의 일파(一派)를 일으키게 되었음. 또 고금(古今)의 서화(書畫)를 모아 『선화전화보(宣化電畫譜)』를 만듦.

 

 

불안하고 또 불안한 내면을 가졌으리라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가득하여 늘 마음이 들끓거나 지나치게 고요하였으리라

 

아름다움에 스며들면 불안한 내면을 지니는 것일까?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지나치면 마음이 들끓는 것일까?

혹은 마음이 지나칠 정도로 고요해지는 것일까?

 

미(美)적인 인간은

지적인 인간과 다르고,

교양 있는 인간과 다르고,

도덕적인 인간과도 다르다.

 

미적인 인간은 찰나의 아름다움을 쫓는 사람이다.

동시에 영원한 미를 추구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미적인 사람은 강렬한 욕망에 취한 사람이다.

찰나가 곧 영원이 되는 아름다움에 미친 사람이다.

 

그의 내면은 뜨겁다.

그의 내면은 동시에 서늘하다.

불안으로 들끓지만

다른 모든 사물들에 대해 냉정하다.

사람과도 거리를 유지한다.

 

 

그는 나를 그의 글 앞에 아주 오래 세워두고 마음껏 어떤 알 수 없는 고통과 희열에 열중하게 했다

 

예술품을 마주하면서 어떤 고통을 느끼는 것은 기이한 일이다.

동시에 희열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고통에 가까운 희열?

뭔가 가슴을 치받는 듯 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기쁨!

이런 게 있을까.

왠지 불안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예술품, 이런 게 있을까.

 

 

뼈대만 남아 있는 신경질적인 운필법이 나의 몸 어딘가와 친밀하게 마주 보려 한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우울한 일이었다

 

매우 가는 필치로 써내려간 글자들.

신경질적인 운필법이 나의 몸 어딘가를 건드린다.

붓이 내 몸 어딘가를 간질일 때의 느낌 ― 그럼 우울해지는 것일까?

 

깊은 우울에 빠져들게 하는 필체

글의 내용과 무관하게 운필법,

어떤 스타일만으로 사람을 불안의 구렁으로 몰고 하는 예술!

 

 

붓을 멈추거나 꺾었던 흔적들이 강하게 남아 있어 예민했던 그의 눈길이나 손놀림을 따라가보며 괜히 마음을 어지럽히기도 했지만 그 어지러운 마음 뒤에 한참을 더 한참을 더 한적해지는 고운 일도 있었다

 

예민한 예술가의 눈길과 손놀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그러나 어지러웠던 마음을 한참 더 한적하게 만드는 ‘고운’ 일이 벌어진다.

 

고귀한 예술이란 그런 것인가.

사람의 마음을 혼란에 빠뜨렸다가 지극한 평온으로 이끄는 것!

 

 

어찌 보아야만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겠는가……

 

예술은 아는 것만큼 보인다고 했다.

그런데 시인은 되묻는다.

 

어떻게 보아야 알 수 있는가?

 

보는 것과 아는 것,

아는 것과 보는 것.

어떤 것이 먼저이고,

어떤 것이 궁극의 목적인가?

 

아는 것인가, 보는 것인가?

 

알기 위해 보는 것인가?

제대로 보기 위해 알아야 하는 것인가?

 

어쩌면 알지 못하기 때문에 더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닌가?

제대로 볼 수 없기에 더 매혹되는 것이 아닌가?

 

예술이란 사람을 매혹하여 더 보고 싶게 하고, 알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고, 불안을 야기하다가 어느새 평온으로 이끄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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