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신해욱 <이렇게 추운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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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신해욱 <이렇게 추운 날에>

by 브린니 2021. 4. 27.

이렇게 추운 날에

 

 

이렇게 추운 날에. 열쇠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 추운 날에.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뭘까. 이 어리석음은 뭘까.

 

얼음일까.

 

얼음의 마음일까.

 

막연히 문을 당기자 어깨가 빠지고

뼈가 쏟아지고

 

쏟아진 뼈들이 춤을 출 수 없게 하소서

경건한 노래가 굴러떨어지고

 

뼈만 남은 이야기에 언젠가 눈이 내리는데

 

깨진 약속들이 맹목적으로 반짝이게 되는데

 

일관성을 잃은 믿음과

열쇠와

열쇠 구멍과

 

이렇게 추운 날에. 너는 있다. 여전히 있다. 터무니없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이렇게 추운 날에

 

모든 밤의 바깥에서

 

―신해욱

 

 

【산책】

 

날씨가 추운데 집 열쇠가 맞지 않는다.

자동차 키가 맞지 않는다.

밖에서 덜덜 떤다.

 

그런데 요즘은 열쇠로 문을 열고 닫지 않는다.

도어록은 비밀번호로 열고

자동차는 호주머니에 카드를 넣고만 있어도 저절로 열리고 닫힌다.

 

 

누군가의 집 앞에서 덜덜 떨면서 그 사람이 밖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려본 적 있는가.

전화를 걸거나

 

내가 집 앞에서 기다린다는 것을 결코 알리지 않고,

오직 그 사람이 나오기만을 기다릴 때

 

문이 열리고 그 사람이 나올 때가 그 환희를 아는가.

 

 

이렇게 추운 날에. 너는 있다. 여전히 있다. 터무니없이 약속을 지키고 있다.

 

아주 다른 것이 되어

 

이렇게 추운 날에

 

모든 밤의 바깥에서

 

 

우리는 춥거나 덥거나 상관없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어야 한다.

그 약속의 내용과 상관없이 오직 약속이기 때문에.

 

약속이란 모름지기 지켜져야 한다는 바로 그 원칙 때문에.

약속을 어기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기에.

 

 

깨진 약속들이 맹목적으로 반짝이게 되는데

 

일관성을 잃은 믿음과

 

 

추운 날 밖에서 덜덜 떨고 나면 인생의 맛을 좀 더 세게 느낀다.

열쇠 하나 때문에.

 

소소하고,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

 

 

막연히 문을 당기자 어깨가 빠지고

뼈가 쏟아지고

 

쏟아진 뼈들이 춤을 출 수 없게 하소서

경건한 노래가 굴러떨어지고

 

뼈만 남은 이야기에 언젠가 눈이 내리는데

 

 

억지로 문을 열려고 힘을 주는데 팔이 빠진다.

뼈들이 몸 밖으로 쏟아져 나와 제각기 춤을 춘다.

 

탈구된 몸.

몸 밖으로 나온 뼈들이 경건한 노래를 한다.

 

인생이란 늘 밖에 있는, 내면의 삶이다.

 

 

모든 밤의 바깥에서 인생의 날들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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