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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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파블로 네루다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by 브린니 2021. 5. 1.

죽은 가난한 사람에게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너무도 어렵게 지낸 나머지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는 집도 땅도 없었고,

알파벳도 이불도

구운 고기도 없었으며,

그리하여 여기저기로 노상

옮겨다녔고,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다행히도(그리고 이상하게도) 그들은 마음이 똑같았다,

주교에서부터 판사에 이르기까지

그가 천국에 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은 죽었다, 나무랄 데 없이 죽었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

오 우리의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부리고 거둘 수 있을까?

 

그는 항상 그걸 했다; 잔혹하게

그는 미개지와 싸웠다,

그리고 이제 하늘이 그가 일구도록 완만히 놓여 있다,

나중에, 하늘의 수확 중에

그는 자기 몫을 가질 것이고, 그렇게 높은 데서

그의 식탁에는, 하늘엣 배부르기 위해

모든 게 차려진다,

우리의 가난한 사람은, 아래 세상에서의

운명으로, 약 60년의 굶주림을 갖고 왔다,

마침내, 당연하게도,

삶으로부터 더 이상 두들겨맞지 않고

먹기 위해 제물이 되지 않은 채 만족스럽기 위하여;

땅 밑 상자 속에서 집처럼 안전해

이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 투쟁을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정의를 바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그들은 그의 컵을 채워주었고 그게 그는 좋았다;

그는 행복에 겨워 벙어리가 되었다.

 

그는 얼마나 무거운가, 그 가난하고 가난한 사람은!

그는 뼈자루였다, 검은 눈을 가진,

그리고 이제 우리는 안다, 그의 무게 하나만으로,

너무 많은 걸 그는 갖지 못했었다는 걸,

만일 이 힘이 계속 쓰여서

미개지를 갈아엎고, 돌을 골라내고,

밀을 거두고, 땅에 물을 주고

유황을 갈아 가루로 만들고, 땔나무를 운반했다면,

그리고 이렇게 무거운 사람이 구두가 없었다면,

아, 비참하다, 이 힘줄과 근육이

완전히 분리된 인간이, 사는 동안 정의를

누린 적이 없다면,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때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그런데도

노동을 계속했고, 이제, 관에 든 그를

우리 어깨로 들어올리고 있다면,

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얼마나 갖지 못했는지를,

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안다 우리가 그에게 주지 않은 모든 걸

우리가 짊어지고 있음을, 그리고 때가 늦었음을;

그는 우리한테 무게를 달고, 우리는 그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

 

우리의 죽은 사람은 얼마나 많은 사람의 무게를 달까?

 

그는 이 세상이 하는 만큼 많이 무게를 단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 이 죽은 사람을 어깨에 메고 간다. 분명히

하늘은 빵을 풍부하게 구우시리라.

 

―파블로 네루다

 

 

【산책】

 

오늘 우리는 우리의 가난한 사람을 묻는다;

그가 사람으로서 인격을 지니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죽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인격을 인정받는 사람이 있다.

가난해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하다가 장례식에서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다.

 

그가 가난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는 인간 대접을 못받았다.

가난은 왜 인격을 잃어버릴 정도로 가혹한 것일까.

 

 

생활의 결핍으로 죽어갔다,

죽어갔다 조금씩 조금씩―

그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온 삶이다.

 

가난이 자신의 삶을 조금씩 갉아먹었고, 결국 그 가난에 잡아먹히고 말았다.

평생을……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오직 결핍 상태 속에서

 

 

가난한 사람은 천국을 얻을 것이라고 성경에 쓰여 있다.

천국에 간 그는 하늘을 얻었다.

 

그는 그 많은 하늘을 갖고 뭘 할지 모를 것이다.

그는 그걸 일굴 수 있을까, 씨 부리고 거둘 수 있을까?

 

천국에서도 노동이 있다면 땅이 아닌 하늘을 일구면서 풍요를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냥 편안히 쉬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그는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움직이지 않았고,

임금 투쟁을 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그는 그런 정의를 바라지 못했다, 이 사람은.

갑자기 그들은 그의 컵을 채워주었고 그게 그는 좋았다;

그는 행복에 겨워 벙어리가 되었다.

 

천국에서는 살기 위해 땅에서 애쓰던 모든 것이 필요없다.

정의를 바랄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정의란 천국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 꼭 꼭 꼭 필요하다.

 

과연 이 땅에 정의란 없는 것일까?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채 죽어가게 내버려둔 이 땅에 정의란 과연 없는가!

 

(가난한 사람이 죽으면 정말 천국에서 행복하게 사는 것일까?)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때리고

모든 사람이 그를 넘어뜨리며,

이제 우리는 적어도 안다

그가 지상에 살 때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그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가난을 오직 개인의 문제로 돌리면서 우리는 그를 돌보지 않았다.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라 하셨느니라(이사야1:17)”

 

성경 말씀처럼 고아와 과부와 같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선행과 정의를 우리는 행하지 알았다.

죄란 그런 것이다. 선을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하지 아니하면 죄니라(야고보서 4:17)”

 

 

그리스 신화에서는 사람을 장례하지 않는 것이 그 사람을 모욕하는 행위가 된다.

장례만이라도 제대로 치러주어야 그 사람의 인격이 존중받는 것이다.

 

가난해서 장례조차 치르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가난한 사람에게 하늘에서의 풍요가 기다리고 있다.

 

살면서 맛보지 못한 빵을 하늘에서 맘껏 먹을 수 있기를!

그러나 죽은 뒤 얻는 행복이 살아서 맛보지 못한 행복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

 

같을까 다를까.

더 못할까 훨씬 더 나을까.

 

궁금하다.

죽은 뒤의 행복의 질감이 어떠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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