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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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6)

by 브린니 2020. 11. 29.

진짜 교회 36

 

 

느헤미야 형제는 주일보다 평일에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성전과 교육관을 리모델링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OO교회를 섬기게 되자마자 어떻게 하면 성도들과 목회자들이 서로 벽을 허물고 대화하고 소통하면서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할 수 있는지 많은 분들과 함께 고민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가톨릭 전통 중에 요즘 시대에 적용할 만한 게 있다면 고해성사라고 생각해오고 있었다.

고해성사의 단점이라면 성도가 고해를 하고, 신부가 그 죄를 사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을 훌훌 털고 다시 세상으로 나가 같은 죄를 반복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개신교 신자들 역시 1주일마다 교회에 나와 회개 기도를 하고, 다시 세상에서 반복적으로 죄를 짓기는 마찬가지였다.

 

느헤미야 형제는 성도가 죄를 고백하고, 사제가 죄를 용서하는 식의 고해성사보다는 그저 성도들이 목회자와 마음에 있는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필요하다는 생각이었다.

 

느헤미야는 성전 곳곳에 힐링룸을 마련했다. 고해소와 거의 같은 인테리어를 한 방에서 목회자와 성도가 만나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성도가 시간을 정하면 상담을 원하는 목회자와 매칭을 하거나 시간이 맞는 목회자가 방으로 들어가 서로 얼굴을 보지 않은 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다.

 

시간제한은 없지만 대략 1시간 내로 상담 시간을 정했다. 상담내용은 제한이 없었다. 죄를 고백할 수도 있고, 개인사나 가족관계, 직장문제, 학업 등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고민거리를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를 위해서 목회자들은 상담교육을 다시 받았다. 전문상담가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들었고, 실습도 했다. 목회자들은 서로 서로에게 상담사 역할을 하면서 자신의 고충을 이야기하거나 듣고 조언을 나눴다.

 

대부분의 고해성사나 상담이 그렇듯 목회자들은 충실히 듣는 역할을 감당했다. 섣불리 자신의 의견을 내거나 조언하는 일은 삼가야 했다. 힐링룸의 첫 번째 목표가 성도들이 속에 있는 이야기를 마음껏 하는 데 있었다.

 

평일에 교회에 나와 힐링룸을 이용할 시간이 없는 분들은 힐링전화로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또 목회자가 모자라는 경우 힐링룸에서 혼자서 이야기할 수도 있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해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고 이야기 하는 것이다. 목회자의 조언을 원할 경우 버튼을 눌러 이야기를 녹음할 수도 있었다. 그럼 그 이야기를 들은 목회자가 조언을 녹음으로 남겨놓는 식이었다.

 

성도들 가운데 목회자로 인해 상처를 받은 경우가 많은데 힐링룸에서 모든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위로를 경험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교육관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지역주민들에게 개방하는 쪽으로 리모델링을 하고 있었다. 가장 우선적으로는 지역주민을 위한 모임방을 여러 개 만드는 것이었다. 성도들이든 그렇지 않든 모여서 친목을 나누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교회 식당은 공동주방으로 이미 개방되었다. 주방에서 식사를 나눈 분들이 여러 개의 모임방에서 자유롭게 차를 나누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가격이 저렴한 카페도 여러 개 열었다.

 

청소년들을 위한 공부방, 학습실도 여러 개 마련하였다. 아울러 청소년용 힐링룸도 마련했다. 힐링룸에서 상담을 받을 수 있는 것은 물론 게임기와 PC, 노래방기기 등도 설치해서 스트레스를 마음껏 풀 수 있도록 했다.

 

부모님과 함께 와서 서로 대화하는 장소도 마련했다. 부모님과 청소년들이 식사를 같이 하고 차를 마시고, 함께 게임도 하고, 노래도 부르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바라는 바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부부를 위한 힐링룸도 있었다. 편안한 자세로 눕거나 앉아서 서로가 서로에게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 마음의 상처들을 나누는 것이다.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성도들도 자원봉사를 원하면 누구나 상담교육을 받고, 힐링룸 봉사자가 될 수 있었다.

기존에 있던 작은 도서관도 여러 개 더 열었다. 음반을 들을 수 있는 방과 작은 영화관도 열어서 즐길 수 있도록 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교회(성전)가 예배드리는 장소에서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서로 사귀고, 사랑을 나누는 곳으로 변하기를 바랐다.

 

일주일 동안 텅 비었다가 주일에 문을 여는 영업장처럼 변한 것이 오늘날 교회(성전)이었다. 하지만 교회는 일주일 내내 열려 있고,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거리며 웃음과 이야기가 끊이지 않는 곳이 될 수 있어야 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교회는 사람 그 자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고, 이제 OO교회에서 그 믿음이 현실로 바뀌는 것을 보고 싶었다.

 

성전은 건물이 없는 개척교회들에 개방되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OO교회의 주일예배를 오전 7시, 9시 11시, 그리고 저녁 7시 예배, 4번으로 줄였다. 그리고 1시, 3시, 5시에 어느 교회든, 어느 목회자든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수 있도록 했다.

 

평일에도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교회나 선교단체 기타 성도들의 모든 모임을 위해 성전을 개방했다. 각종 부흥회나 컨퍼런스, 세미나 등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교회(성전)가 딱딱하게 굳은 고딕건물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언제나 열려 있고, 원하는 모든 사람이 들어와 평안과 안식을 누리는 곳이 되기를 원했다.

 

사실은 움직이는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든 원하는 곳이 있으면 교회가 움직여서 그곳을 찾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위로를 전했으면 했다.

 

목회자가 없는 시골교회를 찾아가 함께 예배드리고, 아예 교회가 없는 섬마을로 가서 예배드리고 마을 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기를 바랐다.

 

느헤미야 형제는 OO교회의 역량을 모아 필요한 곳을 섬길 수 있도록 준비했다. 교회가 변화산에서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여기 머물러 있는 것을 경계했다. 언제든 움직이고, 부르는 곳으로 달려갈 수 있도록 했다.

교회는 세상 속에 우뚝 솟은, 접근할 수 없는 고딕성이 아니었다. 오히려 교회는 낮아져서, 부드러워져서 물처럼 세상에 스며서 세상을 씻기고, 정화하고, 사람들을 하나로 섞는 일을 해야 했다. 성도들이 세상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통로가 되어야 했다.

 

교회는 고체가 아니라 물처럼 공기처럼 세상으로 스며들고 섞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했다. 우리의 삶으로 세상이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하나 되는 일을 해야 했다.

 

힐링전화는 거의 매일 통화중이었다. 목회자나 상담자와 통화가 안 될 경우 녹음 버튼을 눌러 이야기를 남길 수도 있었다. 느헤미야 형제 역시 하루 4시간씩 전화를 받고 상담하느라 반나절을 썼다.

 

상담전화의 내용은 정말 갖가지였다. 엄청난 죄를 고백하는 경우도 있었다. 개인적인 고민에서부터 가족관계를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 취업, 진학, 여러 가지 일상적인 문제까지 터져나오는 이야기를 다 듣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느헤미야 형제는 성도들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흘린 적도 많았다. 그동안 성도들은 그저 교회에만 왔다가 갔다가 했을 뿐 자신의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들어줄 귀가 없었다. 아픈 마음을 열 수조차 없었다. 그러나 귀가 열리자 속에 있는 응어리들을 마구 쏟아냈다. 들을 귀가 부족했다.

 

소문을 들은 지역주민들도 교회로 고민거리를 가지고 왔다. 힐링룸은 늘 만원이었다. 전화는 번호를 몇 개 더 열었고, 많은 성도들이 상담 자원봉사를 지원했다.

 

이제 교회는 그저 건물이 아니었다. 교회는 움직이고 있었다. 상담내용을 듣고, 꼭 도움이 필요한 곳으로 달려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보탰다. 그저 고민이나 사연을 듣고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 두지 않았다. 법적인 문제가 있으면 교회의 법조인들의 도움을 구했고,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한 사람도 적극적으로 도왔다. 교회의 많은 재정을 구제기금으로 돌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의 마음이었다. 교회에 나오는데도 마음에 상처를 갖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더욱이 문제는 교회를 나오기 전에는 상처가 없었는데 교회에 나와서 오히려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성도들이 교회 자체에 대해 심각한 회의를 품는 경우가 많았다. 목회자와의 관계에서부터 교회의 재정, 교회가 성도들을 대하는 방식 등 각종 문제를 호소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주로 이런 상담 건들을 들으려고 노력했다. 느헤미야 형제는 교회 때문에 생긴 상처들을 상담하고 난 뒤 목회자들을 모아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교회의 문제는 곧 목회자의 문제입니다.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내려와야 합니다. 목회자들이 왕노릇하는 구조를 깨부숴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말하면서 성도들 위에 군림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섬긴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섬김을 받고 있습니다. 성도가 목회자를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청소를 한 번 제대로 하신 적 있습니까? 진정으로 성도 한 분을 섬기신 적이 있습니까? 개인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서 어려운 이웃을 도운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사랑은 겸손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높은 자리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동정입니다. 낮은 곳에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겨야 사랑이 가능합니다.

 

목회자가 높은 곳에서 낮은 자리의 성도들을 섬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여러분의 단에서 내려와서 겸손하게 섬겨야 합니다. 섬긴답시고,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고, 충고나 하면서 성도들을 돕고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라는 타이틀,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허리에 수건을 동이고,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꿇고 발을 씻겨야 합니다.

 

여러분이 높은 곳에서 말만으로 섬긴다는 포즈를 취하는 한 성도들은 교회에서 상처받고 상한 마음으로 교회를 떠나게 될 것입니다.

 

현재 가나안 성도들은 모두 목회자 책임입니다. 목회자는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목회자들이 스스로 구별된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는 스스로를 성도의 한 사람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만 직분이 목회자일 따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 다 성도일 뿐입니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제자들도 서로 자신이 더 높다고 싸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는 자부심이 교만으로 변질되어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라고 해서 특별히 선택받은 선민처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을 보십시오. 평일에 열심히 일하고, 주일에 교회를 섬깁니다. 그것이 더 충성되지 않습니까? 직업이 목사라서 평일에는 주일을 준비하고 있을 뿐 다른 성도들처럼 노동을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목회자는 주일에 일하고 평일에 노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종으로서 평일에도 주를 위해 일하고, 주일에도 교회를 섬기는 자들입니다.

 

목회자의 특권의식을 버리고 성도들 이상으로 노동하고, 성도들 이상으로 주를 섬기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주를 섬기는 일이 바로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를 섬긴답시고, 성도들 위에 군림하려 들어선 안 됩니다. 주를 사랑하는 것이 곧 성도들을 섬기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사랑은 곧 이웃 사랑이지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교회는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하나님처럼 섬기려고 애쓰고 있었다. 성도들을 서로 서로 사랑하고, 돕고, 배려하려고 힘썼다. 교회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문을 열고 그들을 초대하고. 먹이고, 보살피는 데 역량을 집중했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교회가 움직이고 있었다. 물처럼 공기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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