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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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글(시, 짧은 소설)

[장편소설 연재] 진짜 교회 (35)

by 브린니 2020. 11. 28.

진짜 교회 35

 

느헤미야 형제는 주일밤 예배에서 돈에 관한 주제로 말씀을 나누기로 마음먹었다. 현재 우리의 삶은 돈에 얽매여 있다. 돈 없이는 살 수 없는 게 자본주의 사회의 삶이며, 돈이 곧 행복의 척도가 되고 있다. 돈이 있어야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살 수 있다.

 

지금 청빈하게 살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 것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지 않는 것인가.

 

가난한 성도가 돈을 많이 벌고 싶고 좀 편히 살고 싶다고 소망을 것이 죄가 될까. 그것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일까.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돈이 그 사람의 인생의 전부라면 그것은 죄가 될 수 있고, 우상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돈을 우리의 삶에서 귀중하지만 죄와 우상이 되지 않도록 할 수 있을까. 돈은 생존에 필수조건이다. 그러나 삶의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의 삶에는 돈을 제외하고도 많은 것이 있으니까. 그러나 돈이 없으면 생존에 어려움을 느낀다.

 

돈이 적당이 있고, 생존에 어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돈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돈이 우상이 되는 삶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어야 한다.

 

돈이 생존과 적당한 삶의 여건을 충족시키고 나면 잉여가 된다. 문제는 잉여의 돈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잉여의 돈을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많은 잉여를 위해 여윳돈을 불리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돈의 활용이다. 그러나 그것을 주님이 기뻐하실까.

 

나눌수록 더 많아진다.

이것이 주님의 법칙이다. 돈을 나누면 줄어든다. 그러나 기쁨과 행복은 더 풍부해진다.

 

우리는 돈을 어떻게 쓸 것인가, 목표를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돈을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쓰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 선교 헌금이나 건축 헌금을 낸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가 확장하는 하는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에서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그것은 틀린 말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전부는 아니다. 우선 선교는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선교는 삶으로 하는 것이다. 미전도국가나 미전도종족에게 돈을 퍼준다고 해서 선교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이 우리의 삶을 통해 우리와 가까워지고, 우리와 소통하면서 그리스도에 대해 알게 되고, 그리스도의 삶을 따를 수 있어야 진짜 선교인 것이다.

 

성전 건축이 하나님나라가 확장되는 것이라고 믿었던 시대는 지났다. 초대교회는 교회 자체가 하나님나라라고 말할 만 했고, 교회를 세우는 것이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여는 길이었다.

 

그러나 교회가 지천인 지금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제 교회는 성전이 아니라 곧 그리스도인 자체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사느냐가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길이다.

돈이 필요하다면 그리스도인이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쓰여야 한다.

 

느헤미야 형제는 단에 오르지 않고, 성가대 악보대를 두고 성도들 앞에 섰다.

그리고 조용히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태복음 6:20을 함께 읽도록 합시다.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적질도 못하느니라(개역한글)

같은 의미 구절인 누가복음 12:33도 함께 읽어볼까요.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주머니를 만들라 곧 하늘에 둔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적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개역한글)

 

우리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믿고 각종 헌금을 내는 데 열심을 부립니다. 교회에 헌금을 내는 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지요. 네, 매우 귀한 일입니다. 하지만 교회에 내는 것 못지않게 구제하는 것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소유를 팔아 구제하는 것이 곧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하늘에는 우리의 보물이 있습니다. 그 보물주머니에는 우리가 헌금한 내용이 들어있고, 또 우리가 구제한 것도 들어 있습니다. 그 보물 때문에 우리는 천국에서 상급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보물은 이 땅에서 어떤 쓰임새가 있었느냐에 따라 상급도 달라질 것입니다. 교회에 헌금한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가 어렵고 가난한 이웃을 도운 것은 정말 귀합니다. 거기엔 사랑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제한 것은 어떤 목적도 이익도 없습니다.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습니다. 그저 사랑으로 나눈 것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상에 계실 때 두 가지를 특히 강조하시면서 많은 설교를 하셨습니다. 하나는 하나님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돈입니다.

 

예수님은 왜 이 두 가지에 대해 많이 말씀하셨을까요.

첫째 하나님나라(천국)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자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를 이 땅에 가져오셨습니다.

 

이사야 61:1에는 예수님에 대해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1)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하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그리스도, 메시야가 당신이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누가복음 7:2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천국이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통치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이 하나님의 법으로 자기 백성을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율법으로 이스라엘, 유다 백성을 다스리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신 뒤로는 예수님의 법으로 모든 나라를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의 법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의 법입니다.

 

사랑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목숨을 버려 죄인들을 구하신 사랑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과 같은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 그러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예수님의 법은 오직 사랑입니다.

 

구약시대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몸을 죽여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사랑의 법을 여시고 그것을 이루셨습니다.

 

구원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사랑으로 내 이웃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사실을 믿는 것에서 벗어나 내가 이웃을 위해 죽는 사랑을 몸소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런 하나님나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나라가 하나님의 사랑(자기 아들을 제물로 내어주신 사랑)으로 확장되고 완성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데 돈을 쓰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성전을 건축하거나 교회에 바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헤롯 성전이 금으로 도배하고 있을 때 사흘 만에 헐고 다시 세우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돈을 성전 건축에 쓰는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입니다.

수억, 수십억, 수백억, 심지어 수천억을 들여 멋지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실까요?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그 보물은 우리가 구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크게 칭찬한 사람이 있습니다.

로마 군인 백부장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향해 유대인 중에서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을까요?

 

그는 예수님이 말씀만 하시면 멀리 떨어져 있는 자기 종이 나을 것을 믿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예수님이 여기 계셨더라면 오빠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한 것보다 훨씬 높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백부장에게는 칭찬받을 만한 것이 또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겸손입니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을 여기며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오시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했습니다.

 

또 하나는 사랑입니다.

그는 종을 사랑했고, 그 종을 위해 멀리까지 와서 예수님께 종을 살려달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겸손의 왕이며 사랑의 통치자입니다.

이미 백부장은 이것을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제자입니까?

사랑하는 자입니다.

누가 예수님의 형제입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입니다.

백부장은 이미 사랑과 겸손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한 사실을 믿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습니다.

 

믿음은 사실에 대한 인정이 아닙니다. 믿음은 증표입니다.

믿음은 믿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사는 것의 증명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자기의 삶으로 자기 믿음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를 위해 내놓겠다고 하자

이 집에 구원이 이르렀다고 선포하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가는 것을 망설이지만 그를 보내십니다.

그것은 고넬료의 구제가 하늘에 닿았기 때문입니다.

고넬료의 집은 구원에 이르렀고, 성령을 체험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비단 장사 다비다는 어려운 여인들을 구제하고 도왔습니다.

그녀가 죽자 많은 사람이 슬퍼했습니다.

과연 우리가 죽었을 때 우리를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슬퍼할까요?

 

우리가 십일조와 건축헌금, 선교헌금 등을 많이 냈다고 자랑할 때

어려운 이웃들은 굶주리고, 추위에 떨고 있습니다.

 

교회가 큰 성전과 멋진 시설과 시스템과 프로그램을 자랑할 때

예수님께서 그것을 허물겠다고 말씀하신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과연 우리가 교회 나오라고 교회 나와야 구원받고 천국 간다고 전도하는 것만이 복음을 전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말에 있지 않고, 실천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너의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거절하지 말라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 것을 가져가는 자에게 다시 달라 하지 말라(누가복음 6:29, 30)고 하셨습니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는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야고보서 2:16,17 )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구제를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구제는 그냥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리스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사랑의 실천이며, 믿음의 증거인 것입니다.

 

돈이 가장 문제입니다. 그러나 돈을 우상처럼 섬기지 말고,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십시오.

 

어쩌면 오늘날 우리 교회가 세상 사람으로부터 손가락질 당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 아닙니까?

성도들이 피땀으로 번 돈을 헌금으로 거둬들여서 큰 교회를 짓고, 자기 이름을 내면서 마치 생명록 책에 이름이 기록된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천국은 밭에 숨긴 보물을 발견하고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과연 밭에 숨긴 보물은 무엇일까요?

 

왜 자기 소유를 다 팔아 그것을 사야 할까요?

 

내 소유를 팔아 산 밭에 숨긴 보물은 바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에 둔 나의 보물입니다.

전재산을 팔아 산 진주란 무엇입니까? 그 진주를 사서 다시 비싼 값을 되팔기 위해서 산 것입니까? 그 진주로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는 천국을 사야 합니다. 돈을 주고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천국은 오직 믿음으로 간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믿음이며 그 믿음에 대한 증명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돈을, 심지어 자기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돈을 가난한 이웃과 나눌 때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천국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재산을 팔아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나라와 돈에 관해 많이 설교하셨습니다.

그것은 두 가지가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하나님나라의 통치는 바로 예수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의 다스림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통치를 받기 위해서는 돈을 우상으로 섬겨서는 안 됩니다.

돈이 하나님나라의 통치 안에 들어와야 합니다.

돈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증거로써 쓰일 때 그것은 하나님나라의 통치를 위한 자금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돈을 이웃과 나눌 때 거기에 구원이 이르고, 사랑이 꽃피고, 복음이 전파될 것입니다.

초대교회가 서로 사랑을 나누며 재산을 통용했을 때 거기 성령이 임하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러합니다. 돈은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생존을 충족한 뒤 남은 잉여의 돈으로는 이웃을 구제해야 합니다.

 

구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아무리 구제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이 깃든 구제는 오직 겸손한 사람이 할 수 있습니다.

남 위에서 구제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오직 겸손으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자기보다 더 낫게 여기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겸손이 사랑을 만듭니다. 그 사랑으로 구제할 수 있습니다.

구제한다고 하면서 남을 무시하고 돈 자랑을 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겸손한 사랑으로 구제하는 것만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구제입니다.

 

그렇게 겸손의 왕이신 그리스도가 자기 목숨을 내어주는 사랑으로 내가 피같이 번 돈을 이웃과 사랑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피를 나누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살과 피를 나누어 먹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이 자기 살과 피를 우리에게 나누어주신 것이 아닐까요?

 

우리도 우리가 피처럼, 목숨처럼 여기는 돈을 이웃과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느헤미야 형제는 말씀나누기를 마쳤다.

성도들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하게 잠시 동안 앉아 있었다.

 

느헤미야 형제는 찬송을 부르자고 말했다.

 

겸손히 주를 섬길 때(찬212).

 

 

 

www.youtube.com/watch?v=jQleABEXO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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