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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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by 브린니 2020. 11. 28.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태복음 14장 31절)

 

 

말씀은 예수님께서 위를 걸으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신 후에 혼자 기도하러 가셨을 , 제자들은 위에서 중에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위를 걸어오시니 제자들이 유령이라 하며 두려워하자 예수님은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나니라는 말은에고 에이미나는 나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는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을 때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칭하신스스로 있는 같은에고 에이미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말씀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표현하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위로 오라 하소서하니 예수님께서오라하시어 베드로가 위를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거센 바람을 보고는 무서워서 빠지게 되고주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고믿음이 작은 자여 의심하였느냐 말씀하십니다.

 

여기에서믿음이 작은 ”(올리고피스토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다섯 나오는데, 항상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 곁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그들이 때때로 믿음이 부족한 모습을 보일 하신 말씀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모른다거나 믿기 시작하여 믿음이 작은 사람에게 사용하신 말씀이 아니며, 적어도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성숙해져야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특히 베드로는 말씀에서 있듯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자신도 위로 걸을 있다고 믿고오라 말씀에 의지하여 위로 걸음을 내디딜 정도로 믿음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믿음이 작다고 하신 것은 믿음의 양을 말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질적 측면을 지적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큰가 작은가가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질이 그리스도에 대해 어디까지 도달해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어떤 사람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럴 있습니다. 이미 우리는 수많은 순교자들을 통해 그런 믿음이 있어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확고하고 강한 믿음이 질적 측면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준에 있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질적 측면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신 신비한 존재, 예수님에 대한 비밀을 우리가 없다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티끌만큼도 온전히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생각할 , 과연 누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수준의 질적 측면으로 온전한 믿음을 가졌다고 자신할 있을까 싶습니다.

 

예수님은믿음이 작은 자여라고 말씀하신 후에 의심하였느냐”(에이스 에디스타사스) 물으십니다. 여기에서’(에이스 )라는 말은무엇을 위하여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으로’(디아 )라는 말은무엇 때문에라는 사용하는데, 예수님은무엇을 위하여라는 말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무엇을 위해서라는 물음은무엇 때문에라는 물음보다 훨씬 상대방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물어보는 물음입니다.

 

베드로가 의심하였는지 원인을 묻는 것이 아니라무슨 목적으로’ ‘무엇을 위하여의심했는가를 물으신 것입니다.

 

물음은 단순히 현재의 마음뿐 아니라 내가 바라는 것은 무엇인지, 앞으로 내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이루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 등의 여러 가지 생각을 돌아보게 하는 물음입니다.

 

위에서 예수님을 바라보며 다가가고 있었던 가까운 거리에서 베드로는 무슨 목적을 생각했을까요? 베드로는 자신도 위를 걷게 해달라고 말했을까요?

 

여기에서의심하였느냐라는 말의 의미는이중적으로 하였느냐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갈래로 갈라진 상태를 말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마음이 어떻게 이중적으로 갈라졌는지 추측해 보는 것은 성경을 읽는 사람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어떤 이는 베드로가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앞만 보면서 걸었을 때는 빠졌는데,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돌려 거센 바람을 바라보자 두려워져서 빠졌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눈의 초점이 예수님에게만 있어야지 세상 환경의 어려움을 바라보면 이중적이 되어서 두려움에 빠지고 물에 빠지는 결과를 낫는다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르게도 해석할 있습니다. 베드로가 무엇을 위해서, 무슨 목적을 위해서 마음이 갈라졌는가 하는 부분에서 여러 가지 생각을 있기 때문입니다.

 

다혈질인 베드로가 다른 제자보다도 나서서 위를 걷게 해달라고 때는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 그리고 다른 동료들에게 자신의 뛰어남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모든 것은 추측이기에 무엇 하나를 옳은 해석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님만을 믿고 거센 풍파 몰아치는 세상에서 위를 걸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존재의 원천이 하나님이라 믿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기 위해 오늘 하루를 돌아보고, 삶의 발자국 발자국을 하나님에 기초해서 돌아보며 성찰하고,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나를 지으신 뜻에 알맞을지, 무엇을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이 나를 위해 피흘리신 뜻에 알맞을지 고민하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궁극적으로는 육체를 입으셨으나 하나님의 본성대로 살아가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우리 삶의 목적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언제 믿음을 잃느냐 하는 것은 목적에서 벗어날 때인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베드로에게 하셨듯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믿음이 작은 자여 의심하였느냐 (믿음이 질적으로 낮은 자여, 무엇을 위해서 너는 마음을 이중적으로 가졌느냐?)”

 

주일에 교회에 가면 절대로 되기에 평생 주일성수한 사람도 많고, 십일조를 절대로 떼어먹지 않고 꼬박꼬박 사람도 많고, 액수의 건축헌금을 사람도 많습니다. 그건 믿음의 양이라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믿음이 질적으로 어떠한가는 다른 문제인 같습니다. 그렇게 헌신하고도 여전히 세상 복을 누려 사업의 축복과 건강의 축복과 자녀의 축복을 받는 것이 목적인가, 진정 피흘리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 목적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아무도 자신할 없을 것입니다. 마음속의 이중적인 소망에 대해서 부인할 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오늘도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외치고 있습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육신을 입은 존재가 육신의 영화를 바라볼 소망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물에 빠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음은 0 있구나, 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지점인 같습니다.

 

정교회에서는 기도할 구절을 끊임없이 되풀이 한다고 합니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어쩌면 우리 자신의 실체를 파악하고 나면 남는 기도는 이것밖에 없는지도 모릅니다.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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