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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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by 브린니 2020. 11. 5.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마태복음 13장 44절)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던 지역은 약탈이 많았고 오늘날의 은행처럼 재물을 맡아줄 곳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가진 것을 속에 감춰두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율법에는 만일 일꾼이 밭에서 일을 하다가 보물을 발견하고 파내면, 보물은 당연히 주인의 것이 된다고 쓰여 있습니다.

 

말씀에 나온 사람은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보물을 발견하고도 캐내지 않고 숨겨 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밭을 사기 위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팔았습니다.

 

물론 도덕적으로는 사람이 주인에게 보물을 주는 것이 옳겠지만, 말씀이 의미하는 것은 법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보물의 가치가 모든 것을 팔아 만큼 귀하다는 초점이 있습니다.

 

귀한 천국이라는 보화는 감추어져 있을까요?

 

첫째,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눈앞에서 뻔히 보아도 외면하는 사람, 귀에 들려주어도 귀에 읽듯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천국은 감추어진 것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둘째, 본질을 찾으려는 사람의 근면함을 시험하기 위하여 감추어져 있습니다. 존재의 원천이 무엇인지 부지런히 찾고 구하는 사람만이 천국을 발견할 있도록 것입니다.

 

셋째, 천국을 찾아다니는 사람의 인내를 시험하기 위함입니다. 천국을 발견하기까지는 지속적인 노력이 요구됩니다. 지속적으로 인내하고 노력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천국이 천국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천국은 다음과 같은 사람에게 발견되기 어렵습니다.

 

첫째, 스스로 지혜롭고 의롭다고 생각해 참된 , 의로운 것이 무엇인지 찾아나서지 않는 사람은 결코 진실로 참되고 의로운 천국을 발견할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이 최고의 진리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외의 것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무시하려 듭니다. 이미 자신이 최고의 것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교만한 행동입니다. 따라서 바리새인들처럼 많이 알아도 하나도 모르는 결과를 낳습니다.

 

둘째, 아예 본질과 진리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감각적인 쾌락만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천국을 찾을 없습니다. 이들은 영원성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고 현재의 즐거움을 따라 살기 때문에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기 생각에 좋은 대로 자기 방식대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참된 천국의 보화는 존재의 본질을 찾아 탐구하며 어떠한 교만도 없이 진실되게 낮은 자세로 참된 진리를 찾으려는 사람에게는 오히려 너무나 쉽게 발견할 있는 일상의 속에 숨어 있습니다.

 

보화 사람마다 의미가 다릅니다. 명예, 부귀, 자기 이상과 신념의 실현 여러 가지 보화가 있을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까지 닿는 원하는 이라면 당연히 땅에서 추구하는 이상의 것을 찾고 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의 과학, 인문학, 철학이 설명할 없는 태어남 이전과 죽음 이후의 인간 인식의 변화에 대해서 궁금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원천에 대한 궁금증이며 진리에 대한 앎의 추구입니다.

 

가치는 세상에서 여러 가지 종교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궁극적으로 신과 인간의 합일로 설명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신비가 설명되어집니다. 물질과 신적 인식의 결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통해 설명되는 악의 종말과 제거에 대한 확고부동한 신념이 인간의 삶에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를 이해하고 견디고 용납하며 용서하고 용서받고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바라볼 있는 삶의 의미를 갖게 합니다.

 

그때에 태어남과 삶의 고락과 죽음 이후의 없는 세계에서 오는 허망함에서 건져질 있습니다. 그것을 구원이며 해방이라고 명명할 있으며, 구원을 나누는 것이 바로 천국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의 삶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고 일구어지는 것이며 자라나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허망한 인간의 한계 속에 갇히지 않기에 세상적 가치들을 따르지 않을 있고, 세상의 부조리에 대하여 이해하고 있기에 분노하기보다 어루만지며, 때때로 운명처럼 다가오는 절망에 대하여 우주적 관점에서 매우 작게 점처럼 바라봄으로 견딜 있고, 어떻게 나에게 그럴 있나 싶은 지인의 배신에 대해 마치 상관없는 이처럼 한발짝 떨어져 긍휼을 행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실 우리는 육체의 한계 속에서 관계성을 맺었을 뿐이며, 관계성은 영원히 존재하는 우리 인식의 우주적 항해의 시간에 비하면 거의 점으로도 찍을 없을 만큼 작고 작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창조주의 작품 안에 점처럼 존재하나 동시에 창조주의 작품을 우리 안에 품을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이시나 육체의 한계 안에 들어와 우리와 똑같은 인간의 삶을 살다가 다시 영원한 나라의 왕으로 계신 것처럼 우리 역시 작은 예수가 되어 생의 삶을 살다가 그분과 함께 그곳에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진리를 품고 사는 사람은 천국의 기쁨을 누리는 해방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초인적인 사람들을 가끔 발견합니다.

 

천국을 찾은 사람은 돌아가서 자기의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삽니다. 모든 소유를 판다는 것은 다시는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토록 단호하고 즉각적인 결정을 하게 합니다. 절대적 가치 앞에 모든 상대적 가치가 내려지기 때문입니다.

 

절대적 가치를 발견한 사람은 세상의 상대적 가치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보게 됩니다. 부와 명예, 지식,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릅답다는 예술조차도 사실 천국의 크기와 가치에 비하면 휴지조각과 같습니다.

 

성경은 십자가의 은혜를 값없이 산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천국은 모든 것을 팔아 산다고 되어 있습니다. 사실 둘은 같은 말입니다.

 

모든 것을 팔아 산다고 해도 모든 것은 천국의 가치에 비하면 값없이 공짜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한계, 물질의 한계 속에서 모든 것을 팔았다 한들 영원한 가치,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가치에 비하면 먼지 조각밖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낌없이 모든 상대적 가치들을 내려놓게 되는 것입니다.

 

사실 천국에 대한 인식의 기미는 인간의 역사에서 계속 있어왔습니다. 천국은 희망이나 소망이라는 소박한 말로도 우리 인간들의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미래는 나아질 거라는 소망,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오늘을 살아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희망 속에서 천국을 꿈꿔왔습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신라 사람들은 불국토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를 자신들의 천국이라고 믿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고 믿고 소원하면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소망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 천국, 천국 외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천국을 소망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엉뚱한 곳을 향하여 나아가다가 쓰러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들의 희구를 평가절하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들의 간절한 바람이 오늘날의 세계 인식의 발전을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인간 의식은 진화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목적지는 결국 신과 인간의 합일로서 우리에게 모습을 드러낸 예수 그리스도로 향한다고 믿습니다.

 

가장 위대한 인간(호모 막시무스)이자 가장 겸손한 신인 예수 그리스도라는 답을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세계 인식은 과연 그들의 앎을 따라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앎을 추구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인식은 안다고 생각하는 교만 때문에 자라나지 못합니다. 인식이 자라나지 않은 상태에서 정답만 알고 있는 이는 필연적으로 타인을 무시합니다. 십자군 전쟁이나 타 종교에 대한 배타성, 일반인보다도 못한 상식 이하의 행동은 지점에서 기원합니다.

 

정답을 알고 있는 이여, 정답이 무슨 뜻인지 탐구하십시오. 탐구하기 전에는, 당신은 알고 있는 아닙니다. 모르면서 휘두르는 진리는 당신 자신을 베고, 타인을 벤다는 것이 보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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