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마태복음 13장 31~32절)
겨자는 원래 배추과의 풀로 씨가 많고 향기로워서 양념과 약재로 사용되고, 잎과 줄기는 식용으로도 사용된다고 합니다.
겨자씨는 모든 씨앗보다 작지만 생장력이 강해서 대개 1미터 정도로 크게 자라는데, 특히 팔레스타인 지방에서는 3미터까지도 자라나 큰 나무처럼 무성해집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것을 정원수로 심기도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실 때 겨자씨를 비유로 든 이유는 겨자씨가 자라날 때의 특성이 천국의 특성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첫째, 겨자씨는 크기가 매우 작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자라납니다. 이처럼 천국도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성장해 나갑니다.
둘째, 처음에는 아주 작지만 나중에 3미터에 달하는 크기로 자라는 겨자씨처럼 천국은 미약하고 보잘것없이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거대하게 확장해갑니다.
셋째, 겨자씨는 처음 모습과는 달리 자라난 이후의 모습이 놀랄만큼 변화됩니다. 이처럼 천국은 참여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처음에는 아주 작더라도 나중에는 크고 놀라운 변화를 이루게 됩니다.
우리는 천국이 임하는 모습을 예수님의 재림과 연관지어 하늘에서 나팔소리가 울리고 천사들이 내려오며 웅장한 천국의 빛이 이 땅에 눈부시게 쏟아지는 모습으로 상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겨자씨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천국은 그렇게 웅장하고 크게 갑자기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역에서부터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임한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씨앗은 우리 각 사람 안에서 자라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 땅에 이미 천국이 임하였다는 말씀을 새롭게 돌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우리 내면을 들여다보면 과연 천국이 어디에 있나 싶을 만큼 삶에 지치고 찌들어 힘겨울 때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 안에 뿌려진 씨앗은 다른 것보다 작습니다. 우리 안에 돈의 씨, 명예의 씨, 재능의 씨들이 도리어 이 천국의 씨보다 커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씨가 자란 후에는 풀보다 커서 나무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씨앗이 자라나게 되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 눕고 저리 눕는 풀 같은 돈, 명예, 재능보다 훨씬 더 큰 나무로 자라납니다.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 말입니다.
게다가 더욱 아름다운 것은 그 나무는 혼자 서 있지 않습니다. 그 나무에 공중의 새들이 와서 깃들이기 때문입니다.
공중의 새는 고통에 지쳐 평안과 안식을 갈망하며 쉴 만한 곳을 찾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멈춰 서서 쉴 곳도 없이 날아다니는 ‘공중의 새’라는 낱말이 주는 쓸쓸함과 피곤함, 갈 곳 모르는 정처없음에 대해서 우리는 잘 이해합니다.
우리의 삶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잠시라도 쉬면 경쟁에서 뒤처질 것만 같은 불안감을 가지고 피곤한 날개를 늘 펴고 날고 날고 또 날지만 어디 하나 쉴 곳이 없고 허공에 붕 뜬 채로 과연 내가 가는 곳이 맞는 곳인지도 모른 채 허망한 날갯짓을 쉬지 않고 펄럭대는 우리의 인생을 그냥 한 마디로 ‘공중의 새’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때때로 비를 맞고 폭풍우의 거센 바람을 맞으면서도 쉴 새 없이 나아가야만 하는 인생의 이정표 없는 허망한 피로를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런 인생이 쉴 만한 곳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겨자씨가 자라난 나무입니다. 즉, 누군가의 마음속에 겨자씨만큼 작은 천국이 심겨져 자라났을 때, 그 마음은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 이렇게 지친 인생들을 품을 수 있는 예수님의 마음과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 과정이 바로 작은 예수가 되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두 예수님처럼 이같이 하라고 말씀하셨고, 이것이 우리 안에 임한 천국입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해 지치고 고통받는 이들을 마치 예수님처럼 우리 안의 천국에 품어주는 것, 그래서 평안과 안식을 전해주는 것, 그것이 우리가 소유한 천국입니다.
여기에서 ‘깃들이느니라’는 말은 헬라어로 ‘카타스케노오’인데, 이 말은 천막을 뜻하는 ‘스케노마’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살다, 거주하다’는 뜻의 ‘스케노오’와 ‘아래, 밑’을 가리키는 전치사인 ‘카타’의 합성어로 ‘장막을 세우다, 장막에 들어가다, 진을 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안전하고 지속적으로 거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새들이 깃들일 때 단순히 가지 위에 잠시 내려 쉬었다가 다시 날아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겨자나무에 지속적으로 머물러 지낸다는 의미입니다.
우리를 잠시 쉬게 해주는 세상의 편안함도 물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피곤함을 잊게 해주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임한 천국은 잠깐 동안의 위안이나 휴식이 아니라 우리가 지속적으로 영속적으로 머물며 곤한 영혼의 집으로 거처를 정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삶의 항해를 다시 시작하여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더라도 우리의 마음 속에 영원한 거처로 존재하는 그런 겨자나무인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나의 겨자나무는 타인이 깃들일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는 동시에 타인의 겨자나무 역시 내가 안식할 수 있는 거처가 됩니다. 상호 거처가 되어 연결되는 것이 바로 천국의 확장입니다.
따라서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느낀 겨자씨의 천국은, 사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우리를 포함하며 타인을 감싸 우리 전체를 보호하는 하나의 장막이 됩니다. 그것이 우주적인 천국입니다.
천국은 우리 밖에 있기도 하고, 우리 안에 있기도 하며, 우리 모두를 껴안을 수 있기도 합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오묘함처럼 천국의 이 오묘함은 우리 인식의 한계를 뛰어넘습니다.
그것은 겨자씨처럼 작기도 하고 우주처럼 크기도 하니까요. 우리가 작으면 천국이 겨자씨처럼 작아보일 뿐이지만, 우리가 자라나면 그만큼 커다란 천국을 발견합니다.
이 땅의 고락이 다 끝나고 예수님이 다시 오셔야만 천국이 올 거라는 눈물 나는 믿음에서 벗어나서 우리 안에, 우리 밖에, 우리 모두를 감싸고 있는 천국을 발견하여 행복해지며 이미 임한 천국 때문에 즐거워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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