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3장 23절)
씨 뿌리는 말씀의 비유는 너무나 유명하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밭 등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도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오늘은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더 깊이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전통적으로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귀 기울여 말씀을 진지하게 잘 듣고, 순종하는 겸손한 마음으로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거두는 성도들의 상태를 말합니다.
또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는 철저히 자기를 부인하며 겸손하게 말씀을 수용하려는 의지가 있어서 말씀에 합당하게 생활하여 풍성한 영적 결실을 이루게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이 맺는 결실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로 차이가 나는 것은 각 개인의 다양성과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어떻게 개발하고 사용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지는 기질과 능력의 차이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백 배의 결실을 맺은 사람이나 삼십 배의 결실을 맺은 사람이나 모두 “좋은 땅”으로 예수님께 인정받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눈은 사람의 기준과 다릅니다.
요약하면 “좋은 땅”이란 말씀 앞에서의 순종과 겸손, 자기 부인과 말씀을 따라 살려는 의지를 가진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말씀 앞에서’라는 말은 곧 ‘말씀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과 그분이 하신 말씀 앞에서’라고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말씀을 전하는 대언자 설교자 앞에서가 아닙니다.
인간은 유한합니다. 유한한 인간이 말씀을 바라보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를 이해할 때도 그 말씀의 100%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그 무한한 진리의 일부분, 부스러기에 불과합니다.
그 부스러기 앎을 우리 삶이 나아갈 바에 적용하여 해석하며 살아가는 것은 참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입니다. 그 사실을 인식할 때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읽은 말씀에서 내가 깨달은 것, 그 말씀이 내게 이렇게 지시해주신다고 믿는 것, 그것이 혹시라도 내가 잘못 이해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늘 가지게 됩니다.
이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위험한 사람입니다. 그 누구도 감히 예수님의 말씀을 다 이해한 것처럼 자신있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위험하고 잘못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또 이러한 두려움을 가지고 말씀을 이해하여 참으로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말을 따뜻한 마음으로 경청하여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말씀에 대해서 생각한 바를 말할 때, 그 사람이 얼마나 예수님 앞에서 진실하게 벌거벗은 마음으로 그분의 뜻을 알기를 원하여 깨달은 것인지를 보지 않고, 그 사람이 정규 신학 코스 과정을 공부했는지, 그 사람이 어느 교파에 속하는지, 그 사람이 어느 정도 신앙생활을 했는지, 그 사람이 가진 공식적 자격은 무엇인지 등을 보고 그 사람의 말에 권위를 부여하여 들을지 말지를 결정합니다.
그런 태도는 스스로 그 말을 듣고 분별할 능력이 없을 때는 꼭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자라나는 어린이나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은 이런 공식적 과정을 거친 안전한 곳에서 배우고 익히며 성장해야 합니다.
하지만 성장기가 지나 스스로 설 수 있는 상태의 성도들이라면 더 이상 다른 사람이 깨달아 전해주는 것을 듣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영적 갈급함을 채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계속 그 상태로 머문다면 성장이 멈추고 퇴보하게 됩니다.
왜 퇴보하게 되냐하면 똑 같은 상태를 매년 반복함으로써 새로울 것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면 영적 갈급함도 없어지고 목마름이 무엇인지도 기억하지 못하게 되며 심령이 굳은 땅처럼 딱딱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말씀을 깨달아 자기 삶에 계속 적용하는 신선한 작용이 없이 매년 교회 안에서 주어지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하는 신앙생활을 반복하다 보면 개인적 신앙의 성장이 없이 교회 조직의 일부가 되어 돌아가는 톱니바퀴가 되고 결국 수십 년 신앙생활을 했지만 삶과 신앙이 분리되고 마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지게 됩니다.
교회가 성숙하다면 어린 신앙을 잘 자라나게 하고, 영적 성인기에 도달한 성도들은 각자 예수님 앞에서 스스로 말씀을 깨달아 각자의 삶에 적용하면서 각 개인의 삶의 현장, 즉 가정과 일터에서 예수의 향기가 풍겨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이런 일이 교회 조직을 잘 돌아가게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합니다.
때로는 교회의 교역자보다 이러한 개인들이 더 성장하여 더 말씀을 잘 깨닫고 삶 속에서 더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열매를 잘 맺을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함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아지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겸손의 왕 예수님께서 이미 “너희가 이보다 더 큰 일도 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이 시대의 지도자들은 자신의 가르침으로 성장한 이가 자신보다 얼마든지 더 영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정하는 겸손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 자신의 의도대로 성도들을 움직이는 일이 없어질 것입니다.
상상해 봅니다. 안전하고 따뜻한 교회 안에서 삐약삐약 어린 믿음일 때부터 건강하게 자라서 영적 성인기가 된 성도들이 이제 스스로 말씀을 읽고 주석도 찾아보며 스스로 깨달아 자기 삶에 적용하여 거룩하게 변화되고 이전에 알던 이들이 그를 보며 “다른 사람이 되었다”라고 말하는 광경을.
또 그렇게 자라난 영적 어른들이 많아져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참으로 그를 볼 때 “예수 믿는 사람의 성품이 어떠한지 알겠다”라고 감탄하는 광경을.
그런 성도를 바라보는 다른 사람들의 찬사가 예수님의 귀에 어떻게 들릴지,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실지 생각만 해도 벅찹니다. 예수님의 눈에 들판의 누런 알곡이 가득할 것입니다.
좋은 밭이 되는 것은 전통적으로 교회에서 하라는 것에 순종하고 목회자의 말을 잘 따르며 교회 봉사와 헌금에 힘쓰는 일로 한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좋은 밭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더 발전하여 다양한 형태로 여러 모양으로 지역사회와 일터로 나아가 예수의 성품이 퍼져나가는 것에 더 집중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만나는 일들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분별하여 성도 개인 각자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결정하고 행동하는 자립적 성인기의 신앙을 가질 때가 되었습니다.
조직에 대한 충성과 말씀에 대한 충성을 분별할 수 있어야 하고, 말씀 전하는 이의 권위와 말씀의 권위가 다르다는 것을 알아 인간에게 필요 이상의 충성을 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좋은 밭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이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생각을 맹신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깨닫는 사람은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며, 예수님 앞에 스스로 홀로 서서 대면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의 개인적 관계가 확고하여 누가 뭐래도 주님은 내 마음의 진실함을 아신다는 사실 때문에 흔들리지 않으며 행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자유롭고 어깨가 가벼운 사람입니다. 진리가 그를 자유케 하고 주님 안에서 안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성경 묵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0) | 2020.10.31 |
---|---|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0) | 2020.10.23 |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2) | 2020.10.06 |
많은 의인이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0) | 2020.09.29 |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0) | 2020.09.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