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마태복음 13장 22절)
‘씨 뿌리는 비유’는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 등의 비유가 뜻하는 바에 대해서 많은 설교를 들어왔습니다.
그 중에 가시떨기밭의 비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자신의 내면적인 문제와 갈등 때문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물질 등의 외부적 요인에서 오는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여 말씀의 결실을 맺지 못하는 상태라고 설명하였습니다.
가시떨기밭은 그 흙 자체는 비옥해서 씨가 뿌리내리기에 적합하지만, 땅 위가 잘 손질되지 않아서 곡식과 함께 가시떨기가 같이 자라난 밭입니다. 다시 말해 순수한 신앙의 열정과 세속을 향한 야망이 함께 자라나 자아가 분열된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혜와 세상에서 얻고 싶은 재물과 명예를 동시에 바라고 갈망하기 때문에 둘 다 얻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고 맙니다. 이런 인격은 영적 성숙에 이르지 못합니다. 세상을 향한 갈망이 말씀의 성장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염려라는 것은 흔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로 대표되는 현세적 사고방식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관심에 가득 차면 영원한 가치를 가진 사고를 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염려’라는 말은 헬라어로 ‘메림나’인데, 그 뜻은 ‘마음이 나뉘다, 분열되다’입니다. 핵심은 세상적 가치관에 의해서 마음이 분열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실제로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는 사람이라 해도 마음이 얼마든지 분열되고 나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신앙의 길에 있다고 믿는 사람은 이방인처럼 먹을 것, 입을 것을 구하지 않는다고 자신있게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믿는 사람이 성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되어야 한다는 명분하에 세상의 명예와 재물을 향한 갈망이 보통 사람보다도 더 강한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나뉘어진 마음, 이중적인 마음, 분열된 마음입니다. 입술로는 이방인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다고 자신하면서 공공연하게 믿는 사람들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저 산지를 내게 주시옵소서”하며 세상에서의 성공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이런 모습은 이중적이기 때문에 더욱 가증합니다. 한 손에는 의인이라는 자신감을, 한 손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 대한 멸시와 비판을, 그러면서 가슴속에는 누구보다 더 강한 세속적 열망을 지닌 모습은 바로 예수님 시대에 옷의 술을 늘어뜨리기 좋아했던 유대인의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한편으로는 내 쓸 것 다 아시는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믿음을 지닌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것은 그 믿음대로 별로 노력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애쓰고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쓸 것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에게 도리어 믿음이 없어 인본주의적 노력을 한다고 비난하며, 자신의 게으름을 정당화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늘 꿈을 꿉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다윗과 솔로몬에게 주신 축복을 내게도 주시어 큰 부를 이루고 믿음의 족장이 되겠다는 포부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그런 기도를 어려서부터 부모들의 기도로 들으면서 자랐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그냥 어려서부터 머릿속에 마음속에 젖어들어 있습니다.
큰 믿음으로 하나님이 크게 쓰셔서 만방에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리는 믿음의 사람이 되라고, 먹고 살 것은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니 그런 걱정은 말고, 꿈을 크게 가지고 큰 일을 이루라는 기도를 들으며 자란 믿음의 2세대, 3세대, 4세대들은 이 기도 안에서 이상한 분열적 자아를 형성합니다.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이방인이 하는 것이고, 자기 힘으로 애써 노력하는 것은 인본주의적 노력이며, 오직 하나님을 바라며 다윗처럼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기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능력으로 크게 들어쓰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크게 들어쓰실 그날을 꿈꾸는 게으름뱅이가 됩니다. 그야말로 영적 몽상가요, 현실에서는 쓸모가 없으면서 스스로 의인이라 칭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이방인이요 먹고 살 것만 채우려 드는 세상적 인간이라고 비웃는 매우 비정상적인, 비상식적인 인간이 됩니다.
한국 기독교 100년이 지난 지금, 이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살아가는 기독교 집안의 3,4세대가 많다는 것은 참으로 비극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먹고 살 것을 구하기 위하여 애쓰고 노력하는 것은 정당합니다. 오히려 그것을 비웃을 만큼 그것에 자족하지 못하고 더 큰 무언가를 이루어보겠다는 꿈을 가지고도 그것이 마치 영적인 꿈인 양, 하나님의 꿈인 양 자신의 욕망을 채색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정당한 꿈이 아니기에 자신을 찌르는 가시떨기가 됩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덕이 될 만큼 멋진 크리스천의 인생을 살겠다는 꿈이 사실은 자신의 세속적 성공에 대한 욕망에 하나님의 이름을 덧입힌 가증한 것이기에 말씀의 본질을 왜곡하고 자신을 찔러 멸망에 이릅니다.
그러곤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욕망을 하나님의 꿈으로 덧칠해 놓은 것을 어려서부터 배우고 자랐기 때문에 그것이 옳은 줄 알고, 말씀대로 살았다고 믿기에 도대체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 채 찔려 죽어갑니다.
그래서 참으로 불쌍합니다. 그래서 말라기에서 가장 심각한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너희 제사장들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잘못 가르친 죄, 잘못 이끈 죄가 오늘의 죽음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페스트는 중세 시대를 끝내는 역할을 했습니다. 중세적 신관의 잘못된 것들을 많은 사람들의 죽음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 100년의 잘못된 흐름을 코로나가 끊어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제는 진짜 우리의 내면과 삶의 처절한 현실을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우리의 지적, 영적 수준이 성장했습니다. 더 이상 젊은 세대가 교회에 가지 않는 것은 우리의 지적, 영적 성장의 수준에 맞는 갈급함을 고루한 가르침들이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비정상적인 이중적 믿음의 형태를 보고 자라난 세대들은 생각보다 더 그 가증함을 잘 압니다. 교회에서 인정받는 큐티 선생님 권사님의 아들이 기도하는 권사님의 눈물을 보며 “그 더러운 눈물 치우라”고 말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그 신앙 속에 들어있는 강한 세속적 욕망을 자녀들이 누구보다 더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 세속적 욕망은 자녀들의 학업과 입시와 성공에 대한 강요로 나타나기 쉽기 때문에 자녀들은 부모의 신앙 속에 들어 있는 가시떨기에 찔려 고통받아 저항하며 기도의 눈물을 볼 때 가증하고 더럽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너희의 눈물이 앞을 가려 성전이 보이지 않을 만큼 많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해도 내가 듣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제물의 연기가 역겹다고 하셨습니다.
그 아들의 말이 패역한 아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처럼 들릴 때 우리에게 회개의 기회가 있을 것입니다.
가시떨기밭은 본래 흙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좋은 흙에 떨어진 씨앗처럼 우리 기독교는 지금까지 자라왔습니다. 한국 기독교 100년사의 업적을 누구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왜 우리는 풍성한 결실을 맺지 못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적 욕망은 가시떨기와 같이 말씀이 막힌다고 합니다. 여기서 ‘막힌다’는 것은 헬라어 ‘쉼프니게이’로 ‘질식시키다, 숨막히게 하다’입니다.
세상적 욕망은 우리의 영적인 숨통을 질식시켜 숨막히게 합니다. 세상이 주는 승리의 환상, 성공의 환상을 영적 승리의 환상인 것처럼 착각한 순간 우리의 영적 생명력은 질식하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적 성품은 이중성을 띠며 가증한 존재가 되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자아가 분열하게 됩니다.
그래서 겉으로는 거룩하고 속으로는 더럽기 짝이 없는 이중적 인간이 됩니다. 아무리 싹이 잘 나고 잎이 무성하고 줄기가 굵어도 결국 생명력이 없어 열매를 얻지 못하게 됩니다.
오늘날 이중적이고 분열되어 있고 비정상적이고 비상식적인 행태를 보이는 기독교의 모습은 결국 세상적 성공의 환상을 영적 승리의 환상으로 착각한 데서 오는 가시떨기의 영향이 큰 것 같습니다.
그 가시에 찔려 다 죽기 전에 어서 정신을 차리기를 원합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라고 외치고 싶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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