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이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3장 13절~15절)
예수님은 좋은 밭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에 소수의 사람들이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가 묻자 이렇게 대답을 이어가셨습니다.
이 부분은 마치 하나님이 어떤 사람들은 깨달아 돌이키지 못하도록 작정하신 것처럼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선택하지 않은 것처럼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소중히 여기셔서 아담과 하와 앞에 선악과를 두신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여전히 우리 앞에는 우리의 자유의지로 선택할 수 있는 두 가지 길이 놓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의지로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우리도 자유의지로 우리의 마음을 예수님 앞에서 완악하게 결정할 수 있고, 그 자유의지조차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 자유로운 의지를 주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작정입니다. 그리고 그 자유의지로 예수님 앞에 마음을 열고 돌이키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외면하는 것은 인간입니다.
이사야의 예언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유의지로 하나님에게서 눈을 감고 귀를 막을 거라는 것이며, 그 예언이 그대로 되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어떨까 생각해 봅니다.
“그럴 줄 알았어, 너희가 그렇지 뭐, 너희가 그럴 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지.” 이런 마음일 리가 없습니다.
“너희가 그렇게 하지 말기를 바랐는데, 전지한 나는 이미 너희가 그럴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희가 그러지 말기를 바랐다.” 이런 마음에 더 가까울 거라고 믿습니다.
자유의지를 주신 하나님의 작정도 선하고, 우리가 완악해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도 진심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완악해질 걸 아셨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걸 알기에 그 진심이 더 아팠을 것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완악해진다’는 것은 헬라어 ‘파퀴노’로 살이 찌고 둔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사상과 자기 의지로 가득해 스스로 살이 쪄서 자기 중심적이 된 모습입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자기가 중심에 앉으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단절됩니다.
‘듣기에 둔해진다’는 것은 ‘눌러 내리다’ ‘가리다’라는 뜻으로 자기 의지로 처음부터 듣지 않으려고 하는 상태를 말합니다.
‘눈을 감는다’는 말도 원어는 ‘캄뮈오’인데, 이는 ‘내리닫다’는 뜻으로 눈에 밀납이나 기름 등을 발라 억지로 감게 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즉, 스스로 의지적으로 억지로 눈을 감아 진리를 보지 않고 완강히 거부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돌이키다’는 말은 전존재로 몸을 돌려 하나님께 복귀한다는 뜻으로 ‘회심, 회개’와 같은 의미입니다.
이 ‘돌이킴’은 신앙의 제1단계로 자신이 죄인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 자신이 반성과 회개를 통해서 돌이켜야만 하는 자유의지의 영역입니다.
이렇게 돌이킨 사람은 신앙의 제2단계로 하나님께 고침을 받아 새로운 생활로 들어가 삶의 전반이 바뀌게 됩니다.
즉, 일차적인 문제는 인간 스스로 자신의 죄인됨을 자각하고 돌이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따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영역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말씀을 지킬 것인가, 안 지킬 것인가가 인류의 원죄를 만들어낸 원초적 순간이었듯이 지금 우리의 삶에서도 그 선택의 순간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그것이 우리에게도 원죄가 흐르고 있다는 교리가 내포하는 의미 중 하나일 것입니다.
자유의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음을 완악하게 하는 순간이 바로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입니다.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라는 말씀의 주어가 누구인지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백성은 하나님의 의지로 고침을 받지 못하도록 하신다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 말씀의 주어는 인간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돌이켜 하나님으로부터 고침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왜 인간들은 고침을 받고 싶어하지 않을까요? 그들의 삶에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서 고침을 받으면 그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심한 중독증을 가진 사람이 중독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그의 삶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고침을 받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집중하고 지배받아온 그것을 내놓게 될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깊이 믿지는 말자는 사람도 있습니다. 깊이 믿으면 고난을 통해 연단을 받게 되고, 성숙을 위해 시험이 오며, 자신이 가진 많은 것을 내놓아야 할 것이 두렵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면 자신들이 존중해오던 자신들의 정체성과 같은 율법을 내놓아야 하기에 예수님을 배격합니다. 율법주의는 자신들을 지탱하는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로 인해 대면예배를 중단하라고 하자 그것은 목숨이라 안 된다고 하는 것도 비슷합니다. 그것이 예배가 되었든 기도가 되었든 말씀의 은사가 되었든 깨달음이 되었든 성전이 되었든, 일단 자신의 것이 되면 인간은 그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존재를 버텨주는 정체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우리를 지배할 때는 우리의 눈을 내리눌러 감게 하고, 귀를 닫게 하는 마음의 살찜이 되고 맙니다. 고집이 되고 도그마가 되고 딱딱해져서 우상이 됩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은 무엇이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내 눈을 감기고 귀를 막는다는 것을 늘 인정할 때 우리는 깨어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알던 모든 것들의 총합보다 크시다는 것을 인정해야 눈이 떠지고 귀가 열립니다.
그렇게 크신 분 앞에 꼼짝달싹 못하고 작은 존재가 되어야 내 자유의지를 하나님 앞에 복종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때에야 나의 자유의지는 옳은 길을 선택할 것이고, 참된 날개를 달아 천사와 같이 우리를 변화시키는 성화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자유의지는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합니다. 그것이 피를 흘리며 죽어야 무덤을 지나 부활하여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한 의지로 변화할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눈과 귀를 막아 못 보고 못 듣게 하시는가? 정말 예정된 사람이 있고 선택받은 사람이 있단 말인가?”라는 어리석은 질문은 이제 던져버려야겠습니다.
내 자유의지를 존중하시고, 내 자유의지가 십자가에 못 박혀 참된 생명을 얻기를 원하시는 그분의 의도를 조금은 알 때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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