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예수께서 무리에게 말씀하실 때에 그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예수께 말하려고 밖에 섰더니 한 사람이 예수께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당신께 말하려고 밖에 서 있나이다 하니 말하던 사람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 하시고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12장 46절~50절)
예수님에게는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인 야보고, 요셉, 시몬, 유다와 누이들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장면을 지켜보았으며, 예수님의 승천 이후 오순절 사건에도 참여했고, 형제 야고보는 초대교회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전통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미움을 사고 있었기에 어머니 마리아와 형제들은 걱정이 되어 만나려고 했지만, 둘러싼 무리가 많아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알고도 예수님은 “누가 내 어머니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물론 혈연관계보다 더 위대하고 영원한 영적 가족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호세아 1장 9절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로암미라 하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지 아니할 것임이니라”
‘로암미’란 하나님의 명으로 호세아가 고멜과 결혼한 후에 낳은 아이의 이름입니다. 음란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못할 것을 예언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과 똑같이 예수님도 ‘로암미(Lo-Ammi) 선언’을 하신 것입니다. 이미 선택된 백성이라고 하더라도 각 개개인들이 모두 영원히 선택된 인격들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들 중 누구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은 영적 가족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하신 후에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십니다. 손을 내민다는 것은 애정을 표현하는 동시에 겸손과 확신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향해 ‘성(聖) 가족’임을 선포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이는 ‘성(聖) 가족’이 폐쇄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개방적이고 포괄적이며 무한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성스러운 영적 가족은 지역, 문화, 사상, 계급, 빈부의 차이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개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제한은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가가 참으로 중요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에 열심히 나가서 목사님의 말씀을 잘 듣고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런 경우 목사님이 진실로 아버지의 뜻을 잘 전하고 계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맹목적인 추종으로 이어져 잘못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전적으로 지도자에게 맡기는 것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 이래로 누구나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하물며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조차 각 개인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성스러운 영적 가족이 될 수 없음을 이미 예수님이 선포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신앙 상태는 자신에게 달렸을 뿐,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어느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족조차 가족이라는 이유로 예수님께 기댈 수 없었듯이 말입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뜻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버려진 백성이 될 수 있다는 예수님의 ‘로암미 선언’은 우리에게 두려운 선언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운 도전이며, 동시에 스스로 자기 신앙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수 있는 자유의 선언이기도 합니다.
신앙적 권위를 가진 어느 누구의 억압에도 흔들림없이 오직 예수님만을 바라보면서 걸어갈 수 있는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비록 부딪히고 넘어질지언정 스스로 길을 찾는 사람은 결코 영적인 잠에 빠지지 않습니다. 적절한 신앙적 긴장 속에서 늘 깨어있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와 같은 삶을 살기 위해서 하늘 아버지의 특별한 뜻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에게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셨듯이 열방을 향한 특별한 계획을 계시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 큰 일을 맡기듯이 작은 일을 대할 때 예수님의 성품과 인격을 추구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히려 단순한 것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양심에 거리낄 일을 하면 그 대가로 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 매우 단순한 인과법칙을 두셨는데, 어린아이처럼 그 법칙 안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우선입니다. 거짓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면 마땅히 인과응보로 좋지 않은 결과가 따를 것입니다.
일제강점기가 지속되자 많은 지식인들이 해방이 올 것을 믿지 못하였지만,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본은 거짓을 행하고 있고, 거짓을 행하는 자는 반드시 망한다는 매우 단순한 믿음으로 끝까지 반드시 해방이 올 것을 믿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단순한 믿음이 옳다는 것을 역사가 증명하였습니다.
특별한 계시로서의 하나님의 뜻을 구할 시간에, 차라리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작고 사소한 일들에서부터 단순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실천하는 삶을 살아갔다면, 오늘날처럼 기독교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불신하고 손가락질을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매사에 진실되게 행하고 이웃에게 해를 입히지 않으며,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매우 단순한 일상의 삶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단순성에 순종한다면 그곳이 바로 천국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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