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에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하겠고 또 누구든지 말로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되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 (마태복음 12장 31~32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독은 사하심을 얻되”라는 말씀은 사람이 어떤 죄를 짓거나 모독하는 말을 하더라도 다 용서받을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의 자비가 무한하고 풍성하며,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사건은 완전하고 충만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모독’은 헬라어 ‘블라스페미아’로 ‘심한 비방’이나 ‘지독한 모독’, ‘반대하여 말하다’라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하나님을 비방하는 행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인자’ 즉 예수님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모독한 것조차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성령을 모독하는 것은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이는 성삼위 하나님의 위상 중에서 성령이 탁월하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과연 ‘성령을 모독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령은 죄인에게 죄를 자각하게 하고, 예수님의 초청을 수락하게 할 뿐 아니라 영원한 진리를 깨닫게 하여 성숙한 신앙 인격체로 자라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성부를 멀리하고 성자를 미워하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성령의 거듭나게 하는 역사를 통해 회개에 이를 수 있게 됩니다.
이 성령의 역사를 거부하고 비방하고 모독하는 것은 참회하여 거듭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하므로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불행한 결과를 낳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돌아서는 사람입니다.
성령께서 자기 내면에서 마음을 움직이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고의적으로 거부하고 배척하는 것은 용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막아버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모독한다’는 것은 죄를 깨닫게 하고 돌이키게 하는 성령의 사역에 고의적으로 대항하며 고집스럽게 위악을 떠는 심령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개 믿음 안에서 나고 자랐으며 청소년기에 은혜 체험도 하면서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해왔지만, 성인기에 이르러 비뚤어진 길로 가면서 성령의 깨우침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이들입니다.
그루밍 성폭력으로 눈총을 받는 교회 관계자들이 그렇고, 정치 권력과 손을 잡고 엉뚱한 길로 가는 교회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다윗도 밧세바를 범한 사건이 있지 않냐면서 불륜의 길을 멈추지 못하는 중직자들도 있고, 안 되는 줄 알면서 헌금에 손을 대어 각종 명목으로 돈을 끌어다 쓰는 지도자도 있습니다.
결국 몰래 범하던 죄가 백일하게 드러나면 다들 하나님이 경고하실 때 들었어야 한다고 후회합니다. 그들의 마음속에서 성령께서 수시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인(Sign)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 사인을 외면하면서 멈추지 못하고 죄를 계속 짓는 것이 바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자’를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거역하면 사하심을 얻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인자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인자를 거부하는 것은 예수님이 전하는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잘 몰라 거부했다가도 인생을 살아가면서 다시 언젠가 예수님을 영접하면 그는 죄 사함을 받습니다.
하지만 성령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성령의 내적인 감동이 일어나고 회개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을 충분히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완강하게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렇게 되면 돌이킬 수 없는 죄의 심판에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엉뚱하게 적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령을 거역한다는 말의 의미를 성령의 사람, 즉 종교 지도자를 거역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여 종교 지도자의 말을 잘 들어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말씀을 가져다가 종교 지도자들의 권위를 세우는 목적에 사용하게 됩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말을 성령의 소리로 듣고 무조건적인 순종의 미덕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상식 이하의 일들이 교회 안에서 벌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비상식적인 일을 명령해도 순종하는 행태를 보이는 기독교인을 향하여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일을 행하는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내면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성령의 소리를 거역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가장 낮은 자리에 종으로 오신 예수님을 누구보다 본받아야 할 지도자들이 그 내면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높은 자리에서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고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영원히 사함을 받지 못할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여 이런 잘못된 행태들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는 비극이지만 또한 새롭게 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심판은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되기도 합니다. 이번 기회에 눈을 떠서 분별력을 가지고 정말 성령을 거역하는 게 누구인지 또렷하게 보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썩은 나뭇가지에 앉아 있다가 나무가 꺾일 때 떨어져 죽는 새가 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계속 앉아 있을 수 없을 만큼 썩은 나뭇가지라면 과감히 날개를 펴서 날아가야 할 것입니다. 날아올랐을 때 문득 얼마나 창공은 자유롭고 신선한지 새 숨을 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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