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30절)
이 말씀은 이 땅을 살아가는 크리스천들에게 한편으로는 참으로 답답함을 주고, 한편으로는 참으로 사무치는 그리움을 줍니다.
누구나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예수를 믿는데도 왜 이리 여전히 힘든가 답답하기도 하고, 정말 예수님 말씀처럼 가벼워지고 싶은 사모함 때문에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마음속에 일종의 물음표와 함께 오래 간직됩니다. 우리 신앙은 이 물음표를 들고 걸어가는 순례길이며, 조금씩 그 해답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는 길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선 “내 멍에는 쉽고”에서 ‘쉽고’라는 말의 원어는 크레스토스로 ‘부드럽다, 좋다, 은혜스럽다, 안락하다, 친절하다’는 다양한 뜻으로 해석됩니다.
앞서 멍에는 짐승을 부리기 위해서 씌우는 것으로 보통 일꾼에게 사용될 때는 두 사람이 함께 멍에를 메게 된다고 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지는 일은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같이 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이 땅에서 죄인들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일이며, 그 멍에를 함께 진다면 우리도 타인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부드럽고, 좋은 일이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기에 쉽다고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이 예수의 멍에에 대해 새의 깃털이 창공을 자유롭게 나는 것처럼 가볍다고 설교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멍에인 사랑의 계명,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피곤하고 무겁고 힘든 것이 아니라 부드럽고 좋고 은혜롭고 안락하고 친절한 일이라는 뜻입니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확실한 구원을 가져오며, 그 자체로 선하고 바르고 좋은 것이며, 예수님의 능력에 의존하여 메기 때문에 가벼울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영원한 가치를 가진 일이기 때문에 그 자체에 안식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알콜중독자 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려 고통받으며 늘 자살을 생각하던 한 소년이 생각납니다. 그 소년은 죽고 싶지만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두려워하며 궁금해했습니다. 이에 대에 재야 신학자이며 이십대 때부터 하반신 마비가 되어 평생 휠체어에서 살아오신 분이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죽으면 좋은 것, 바른 것, 선한 것은 영원히 남습니다. 이 땅에서 바르고 좋고 선한 것을 행하면 그것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남게 됩니다.”
기독교 신앙이 없는 그 소년에게도 이 말씀은 아름답게 적용됩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알콜중독 센터의 도움으로 상담을 받고 있는 그 소년이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는 것은 자살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은 바르고 좋고 선한 길로 가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부단히 애쓰며 주변인들의 도움도 기꺼이 받으면서 나아갈 것입니다. 그 길은 영원히 아름다운 길이라는 증명을 받은 길이기에 가벼운 것입니다. 자살이라는 어둡고 무거운 길이 아니라 깃털처럼 가볍고 확실하며 마음에 안식을 주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멍에가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라고 할 때, 우리는 누구나 마음에 걸리는 누군가가 있을 것입니다. 내가 돌보아야 할 가족이나 친지 중 누군가인데, 너무 싫고 밉고 내게 잘못한 게 많아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 꼭 있습니다. 이 때문에 차라리 잘 모르는 남일 때 더 봉사하기가 쉽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그러면서 신실한 크리스천일수록 마음에 찔려 합니다. 잘 모르는 이웃을 도울 때는 마음이 편하고 즐겁고 가볍고 기쁜데, 정작 도와야할 미운 내 친지를 도우려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화가 나고 억울해서 마음이 무겁고 기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독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존속 상해 및 살해 사건이 많은 이유는 가족과 가문에 관한 얽매임이 강하여 그 안에서 발생하는 서로간의 상처가 심하기 때문입니다. 상처는 미움을 낳아 감정의 골이 깊은데다가 가족의 의무에 대한 강요도 심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사태가 심각해지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러나 자연의 모든 이치와는 달리 생명에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합니다. 물론 부모의 결혼으로 인해 자녀가 태어나는 이치는 인과관계에 속하지만, 자녀의 몸을 생산할 뿐 자녀의 정신과 영혼을 생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모두 왜 자신의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다른 부모 밑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왜 대한민국이라는 땅에 태어났는지도 모르며,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굳이 나로 태어났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모두 이 땅의 부모를 건너뛰어 그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에게 맞닿아 있습니다. 내가 왜 이곳에 나로 태어나 존재하는지는 창조주와의 관계를 통해 찾아가야 할 일입니다.
마치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께서 누가 나의 부모이며 누가 나의 형제이냐라고 물으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나의 형제요 부모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사실 우리도 부모에게서 났지만 그 존재의 근원은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난 것이기에 매우 자유로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태어난 무력한 나를 사랑으로 키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며 교육시키고 모든 혜택을 준 부모에 대한 감사는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는 가벼운 상태에서 감사할 수 있습니다.
알콜중독 아버지를 둔 소년이 자라 성인이 되었을 때 누군가가 아버지에 대한 봉양의 의무를 지운다면 소년은 마음속에 분노와 거부감이 들 것입니다. 그 분노와 거부감에 ‘불효’라는 유교적 굴레를 씌워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에 따른 멍에인 것 같습니다. 세상의 멍에는 무겁고 억울하고 화가 납니다.
만약 그 소년이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아버지를 거둔다면 그것은 칭송받을 만한 일이며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의 길을 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 ‘거둠’은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한 이웃 사랑으로 일어난 일이어야 가벼운 멍에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와의 혈연의 끈이 지운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작은 예수인 개인적 주체로서, 타인의 강요가 아닌 철저히 주체적인 선택에 의한 일이어야 가벼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를 얽매고 있는 여러 가지 멍에들을 둘러봅니다. 세상적 도덕과 관습, 형식, 절차, 규례 등에 의해서 무겁게 짐 지워져 있는 것들 중 대다수가 우리에게 주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멍에에 얽매여 있는 한 우리는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없어서 자유를 얻지 못하기에 당연히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이 끌려가게 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려면 세상 멍에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부모에 대한 자녀의 도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도리, 배우자에 대한 도리, 직장 상사에 대한 도리 등의 멍에를 한번쯤 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 멍에의 끈은 사실 창조주와 연결된 내 존재의 근원을 생각해 볼 때, 모두 다 인과관계가 없는 우연적 관계들입니다. 사랑하는 자녀조차 굳이 내 자녀여야 할 이유는 없었던 것입니다. 다른 누군가에게서 태어났을 수도 있는 자녀에게 마치 내 영혼을 다 내어줄 것처럼 얽매여 다 내주고 나서 또 내준 만큼 바라는 등의 어리석은 일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의 끈을 일단 다 내려놓고 자유로워진 상태에서 다시 예수님의 멍에를 지고 어떻게 관계를 맺어나갈지 가벼운 마음으로 생각해 보면 됩니다.
예수님의 눈은 부드럽고, 좋으며, 은혜스럽고, 안락하고, 친절합니다. 딱 그만큼의 눈으로 바라보고 딱 그만큼의 도움을 주면 됩니다. 예수님처럼 대가를 바라지 않고 말입니다.
그 어떤 기대감이나 과거의 주고받음에 대한 대가를 바라는 것도 없이 깃털처럼 가볍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이 깔끔한 관계의 멍에가 우리를 기다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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