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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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by 브린니 2020. 8. 15.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마태복음 11장 29절)

 

크리스천 가정에 새 새명이 태어나면 많은 이들이 ‘온유’라는 이름을 아이에게 붙여줍니다. 살아가면서 힘들고 지치고 화나고 견디기 힘들 때 온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바람으로 우리는 ‘온유’라는 낱말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서 ‘마음’의 원어는 ‘카르디아’로 심장을 의미하지만, 히브리어 관념으로는 전 인격의 핵심적 부분이라고 합니다. 즉 예수님의 본질적 성품을 뜻하는 것으로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는 것은 종(servant)으로서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고난을 당함으로 다른 사람의 아픔을 안다”는 의미가 강합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자녀가 마치 예수님처럼 타인을 섬기면서 고난 당하는 삶을 살라고 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늘에서 하나님의 눈물 방울이 떨어지는 묘사를 하기도 했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스승과 제자의 사이를 표현할 때 함께 멍에를 멘다고 합니다. 멍에는 짐승들을 부리기 위해 지우는 도구로 팔레스타인의 멍에는 혼자 메는 것이 아니라 항상 짝을 이루어 두 일꾼이 함께 메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멘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함께 멘다는 뜻입니다. 이 멍에는 무거운 율법의 멍에가 아니라 사랑의 멍에입니다.

 

예수님은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예수님을 모방하라거나 예수님이 하신 일을 배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 있는 계시의 진리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그 멍에와 그 진리만이 우리의 힘겨운 삶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이는 보다 완전한 신앙생활로의 초대입니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우리 죄를 사하시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그 단편적인 지식만으로 우리 삶의 질고와 고통을 지속적으로 견뎌나갈 힘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구원의 은혜와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며 새로 태어난 듯 환희에 찼다가도 어느 정도 매너리즘에 빠진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기쁨의 빛이 점점 희미해져가고 또 다른 삶의 힘겨움 때문에 신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복적으로 집회와 부흥회를 열고 참석하면서 자꾸만 구원의 기쁨을 되찾으려 노력하는 도돌이표의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신앙생활이란 반복적으로 도는 쳇바퀴 같은 삶으로부터도 구원을 얻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형식화된 신앙생활의 의무와 규례의 멍에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신 새롭고도 가벼운 멍에를 지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멍에를 지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앞서 예수님의 마음과는 구별되는 의미로 ‘프쉬케’입니다. 이는 생명의 요체인 ‘혼’을 의미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기의 의지, 자아를 말합니다.

 

그 자아가 쉼을 얻는다니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얻는다”는 말은 원래 “찾다, 발견하다”라는 뜻으로 그 쉼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찾아 발견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신앙이 걸어가야 할 곳은 예수님 안에 이미 있는 쉼과 안식이지 현실의 율법에 맞추어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반복적으로 지는 율법의 멍에는 무겁지만, 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는 메시지를 주고 계시며,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일의 아주 큰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우리 괴로움의 대부분은 자신의 의지, 즉 자아의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분투하고, 분투하였으나 얻지 못하는 현실에 대한 아픔, 그리고 자아의 의지와는 반대되는 일을 꼭 해야만 하는 의무에 대한 고통 등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또 자신의 의지가 무엇인지 성찰할 사이도 없이 현실의 억압과 고통에 내몰려 인간다운 삶을 다 빼앗겨 버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대를 받는다든가, 인생의 선택의 순간에 내린 결정이 어이없는 결과를 가져와 헤어나올 수 없는 상황에 몰리게 된다든지, 절대로 살고 싶지 않은 인생을 꾸역꾸역 견디며 살아가야 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부모는 스스로 선택할 수 없기에 주어지는 운명과도 같은데, 부모답지 않은 부모 때문에 어려서부터 고통받아 자아가 손상된 사람도 있고, 자신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배우자의 모습 때문에 결혼을 후회하지만 아이 때문에 억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모와 마찬가지로 자녀 역시 우리가 선택할 수 없기에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자녀로 인해 평생 책임지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고, 너무나 예쁘게 잘 자라던 자녀가 질병과 사고로 불구가 된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우리 자신의 의지, 즉 자아의 만족이나 손상으로 인해 행복하거나 불행합니다. 우리 마음은 우리 자신의 삶 안에 매여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의 마음을 상자 속 같은 삶에서 꺼내어 예수님의 심장으로 옮기시길 원하는 것 같습니다. 그 심장은 뜨겁고 아프며 슬프지만 아름답습니다. 사랑으로 가득하지만 희생의 슬픔을 모르지 않으시며 따뜻하지만 배신의 고통 때문에 사무치는 아픔도 들어 있습니다.

 

그 예수님의 심장 안에는 우리의 모든 삶을 능히 담을 만한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으로 덮어 새롭게 부활시키는 것이 무엇인지 또한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그 심장 안으로 들어가야 할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내 삶의 질고를 녹여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통들 속에 내 삶의 고통이 능히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천하를 담고도 남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흘리는 슬픔의 눈물은 동시에 환희의 눈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기 때문에 우리 삶의 고통을 그 안에서 녹이게 됩니다.

 

때로 인생의 고통이 너무 크면 그 예수님의 심장마저도 외면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영화 <파괴된 사나이>를 보면 목사의 딸이 유괴를 당해 아무리 찾아도 살았는지 죽었는지 찾을 수 없게 되자 상심한 나머지 목사는 주일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는 말씀을 전하려 하다가 벌컥 화를 내며 욕설을 내뱉고 목사 가운을 거칠게 벗어 내팽개쳐 버리고 교회 문을 나가 버립니다.

 

목사는 일반인이 되어 생활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딸을 찾게 되는데, 어린 딸이 묻습니다. “아빠는 내가 살아 있을 거라고 믿었어?” 이 한 마디의 말에 목사의 눈망울이 흔들립니다.

 

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의 몸부림에 대해서 우리는 아무도 잘했다 잘못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판단을 하기보다는 그 마음의 아픔을 깊이 아시기에 애처롭고 불쌍히 여기실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고뇌하는 이는 예수님께 돌아올 것입니다. 그들의 영혼에 찍은 예수님의 불도장, 화인이 사랑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치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치셨듯이 우리 인생에서 아프게 외치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그 고통이 쉼을 얻을 곳은 다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장 속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멍에를 함께 멘 사람은 자신의 의지, 자아에 예수님으로부터 부활의 약속을 불어넣습니다. 아무리 현실의 고통에 찌든 자아라 할지라도 부활의 약속 안에서 숨을 쉽니다. 그 숨은 막혀 있던 삶의 물꼬를 터줍니다.

 

우리를 숨 쉬게 하는 것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반복된 율법적 신앙생활이 아니라 뜨겁고도 아픈 예수의 심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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