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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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by 브린니 2020. 8. 3.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마태복음 11장 25절~26절)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는 장면을 상상해 봅니다. 분명히 “대답하여”라고 되어 있으니, 성부 하나님과의 대화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고개를 들고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고 부르시는 모습은 아주 장엄하고 고결한 영적 분위기를 풍깁니다. 이는 예수님의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기도이며 찬양이며 성찰이기도 한 것입니다.

 

특히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라는 표현은 온 우주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모든 것이 그분의 소유이며 그분의 뜻에 달려 있음을 고백하는 표현입니다. 동시에 “아버지”라고 부르심으로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선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에 대해서 Meyer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킨다고 보았지만, 앞 구절들에서 예수님이 고라신과 벳새다, 가버나움 등을 책망하신 것으로 볼 때, 예수님이 활발히 사역하신 것을 보고도 교만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모든 이들을 통틀어 말씀하신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숨기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게 하셨다는 맥락의 말씀은 성경 여기저기에 있고, 이런 말씀을 볼 때 우리들은 고개를 갸웃하곤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까지 내어준 분께서, 교만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숨기셨다”는 것은 어쩐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아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만이야말로 지옥에서 곧장 올라온 죄악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이들은 자기 아집과 편견과 스스로의 이성적 판단으로 교만에 가득찬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나라를 영적으로 깨닫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숨기셨다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자신의 뜻을 숨기기도 하시고 나타내기도 하시니 영적 진리는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가 아니고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비추시는 내적 조명 없이는 그 누구도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계시에 접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모든 의견들이 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4복음서가 쓰여진 것처럼, 책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네 개의 다리가 필요한 것처럼,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 모든 의견이 다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주권적 배려라는 말씀을 핑계 삼아 게을러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숨기기도 하시니 내가 할 일은 마치 없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영적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도리어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말을 듣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성령의 영적 조명은 하나님의 주권이시지만, 그것을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것은 우리의 몫입니다. 아마도 스스로 지혜있고 슬기롭다고 여기는 자들은 다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진리를 이해하고자 하는 열망을 갖지 않는 사람일 것입니다.

 

내가 영적 진리에 대해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더 알기를 갈망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진짜 지혜가 있고 진짜 슬기로운 자들일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영적 어린아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들에게 하나님은 깨닫는 은혜를 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신 이 “어린아이들”은 솔직하고 순박한 사람으로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가르침을 받기를 기뻐하며 더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도와주시기를 구합니다. 자신의 무지에 대하여 ‘거룩한 불만족’을 갖는 사람이야말로 예수님의 내미신 손을 붙잡을 수 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감사하나이다”라고 찬송과 같은 고백을 하십니다. 인간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시는 하나님은 스스로 만족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며 더 이상 진리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결국 구하지 않음으로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신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도 인정하시고 완전히 지지하시고 동의하시는 초월적인 경륜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는 누구라도 인정하지 못할 억울하고 부조리한 것이 아닙니다. 매우 타당하고 그럴 수밖에 없는 원리로서 매우 자연스러운 수레바퀴처럼 굴러갑니다.

 

이에 예수님은 “옳소이다”라고 말씁하십니다. “아버지의 뜻이니이다”라는 말은 직역하면 “당신 앞에 좋게 여겨지는 바가 되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또 이를 아람어식으로 표현하면 “당신의 은혜로우신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교만하여 자고한 사람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고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는 사람은 진리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좋게 여겨지는 순리이며 경륜입니다.

 

이 하나님의 뜻은 전능한 힘이 있어 그 의지가 실현되어 나타납니다. 뜻이 실현되어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의 즐거움이요 기쁨이 됩니다. 그리고 그 뜻 안에서 참으로 신비로운 사랑의 역설이 태어납니다.

 

본래 교만하고 만족하여 스스로 지혜롭다 슬기롭다 여긴 자들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여 심판이 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 심판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순리 앞에 자연스러운 경륜으로 심판을 받게 되는 죄인 앞에 십자가가 서 있다는 것이야말로 구원이라는 이름으로 예비하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때때로 모태신앙으로 태어나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당연히 예수님을 믿으면 죄를 사함받고, 하늘나라의 왕자 공주로 살아간다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어릴 때부터 들어온 사람은 도리어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더 이상의 열망이 없어 무감각한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가 정말로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은, 죄 때문에 심판을 받은 후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당연히 죄를 용서하시는 분이 예수님이니까 회개하면 또 용서받고 회개하면 또 용서받고 그런 어리석은 반복의 나날을 살다가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 임하고 그때에야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그분이 진짜 계시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그럴 때 한편으로 원망의 마음도 든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면서, 용서하시는 예수님이라면서, 죄를 대속하신다면서, 이렇게까지 큰 심판을 내리시는 게 과연 사랑의 하나님 맞나?’ ‘이렇게 되기 전에 무슨 방법으로든지 돌이키게 하시지, 깨닫게 하시지, 이렇게까지 심판이 임하기 전에 돌이킬 방법을 주시지.’

 

그러나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먼저 수긍해야 합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이 창조자이며 그 경륜 속에 살아가는 것임을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 경륜은 누구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인과관계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죄를 지으면 심판이 온다는 것은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법칙입니다.

 

어린아이들도 다 아는 그 법을 지키기 않고 살아가기에 많은 이들이 고통받고 상처를 입고 아파하여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면서 내가 죄를 짓기 이전에, 내가 교만해지기 이전에 미리 손을 쓰지 않으시다니...... 하면서 원망한다면 정말 악하다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이미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다 여기며 교만한 삶을 살아서 어리석게도 영적 진리를 외면하고 심판을 받고 고난에 직면했다면 지금이라도 예수님처럼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동의해야 할 것입니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세상을 지으실 때 아버지가 품으셨던 선하고 아름다운 경륜이며 뜻이니이다. 그것을 모르고 헛되이 살았던 저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리고 이제부터라도 아버지의 뜻대로 겸손한 삶을 살며, 스스로 얼마나 무지했는지 인정하고, 지금부터라도 그 무지에서 벗어나 영적 진리를 깨달아가는 삶을 살고자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심령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럴 때 두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의 따스한 손길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인과율을 넘어선 놀라운 초월적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실 때 담으셨던 그 정교한 인과율의 수레바퀴도 그 자체로 선하지만, 인과율을 뛰어넘어 초월적인 용서를 마련하시기 위해 스스로 인간이 되어 피 흘리셨다는 사실에 오늘도 놀라워 고개를 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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