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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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by 브린니 2020. 7. 30.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3절~24절)

 

가버나움은 예수님이 주로 활동하셨던 곳이어서 다른 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이곳 사람들에게 회개할 있는 기회가 훨씬 많았습니다.

 

하지만 선지자가 자신의 고향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곳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고 말하면서 인정하려 하지 습니다.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말은 번영과 특권을 누린다는 표현이라고 합니다. 가버나움은 예수님의 많은 이적과 권능을 직접 있는 영광을 누렸고, 천국이 이곳에서부터 확산되고 있음에도 오히려 교만의 머리를 하늘로 쳐들고 있었습니다.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말에서음부 헬라어로하데스이고 히브리어로는스올입니다. 말은 무덤이나 보이지 않는 영의 세계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말을 죽음 이후의 지옥으로만 이해한다면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말은 앞에 나온하늘 대조를 이루면서심판 연관되어 교만한 사람들이 처하게 굴욕과 저주와 핍절과 멸망으로 이해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실제로 역사 속에서 이루어져 가버나움은 로마군과 유대인 사이의 전쟁으 초토화됩니다. ‘음부 죽음 이후에만 가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겪는 멸망과 심판일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과 비교하시면서 소돔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소돔 창세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유황과 불을 비같이 내려 멸하신 죄악의 도시입니다.

 

예수님은 멸망한 죄의 도시에서 이적과 권능을 행하셨더라면 소돔이 회개하고 심판을 면하여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도시의 죄악상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비교하시는 분이 아닌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소돔의 죄가 가버나움보다 훨씬 보이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예수님이 직접 걸어다니시면서 눈앞에 권능을 보이는데도 고개를 뻣뻣이 쳐들고 반응하지 않는 가버나움 사람들이 소돔 사람들보다 심각하다고 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가 생각해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세상 진리 중에서 가장 고상한 지식이라고 생각하면서 마치 가장 귀한 것을 가진 자신이, 가장 귀한 사람이 것처럼 느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태운 나귀가 걸어가면서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 환호하는 보고 우쭐거렸다는 이야기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우쭐거리는 나귀로 만들고 있는 아닌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있다고 해서 우리가 예수님이 것이 아닌데도 마치 세상 지식과 가치관은 내가 가진 진리에 비하면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생각으로 높아져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됩니다.

 

사실 나귀는 자기 등에 태운 이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나귀처럼 우리도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저 우리 죄를 대속해주셔서 영원한 구원을 주신 분이라는 교리 아는 것은, 예수님에 관한 첫 발걸음과 같은 지식일 뿐입니다.

 

이렇게 문자화된 교리 줄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우리를 교만하게 뿐입니다. 우리의 삶은 평생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깨달아 알아가는 과정인 같습니다.

 

안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안다는 것이고, 안다는 것은 그분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며, 그분이 안에 있다는 것은 삶에 그분의 원칙이 적용되어 행해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삶의 시작부터 끝까지 선택과 결정과 마음가짐과 태도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생각이 육화된 모습으로 나타나야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알려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님의 삶과 얼마나 닮아 있는지 생각해 보면 것입니다.

 

삶은 닮아 있지 않으면서 단지 예수님에 관한 교리 알고 있다고 해서 우리가 진리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소유했다고 믿는 마음이 교만이 되어 실제로는 속에서 행하시는 예수님의 권능과 이적의 은혜로 살아가면서도 감사함을 모르고 이상 예수님을 알려고 하지 않는 딱딱한 마음이 되고 맙니다.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만의 끝에는 음부에까지 낮아지는 결과가 옵니다. 때로 신실하다고 생각한 기독교인이 고통 속에 처하는 것을 봅니다. 사람을 위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욥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욥처럼 의인도 고난을 받을 있다는 말은 고통을 견디게 합니다.

 

그러나 누가 확신할 있을까요? 고난이 의인에게 예수님 같은 십자가의 삶을 살라고 고난인지, 아니면 모르는 죄악 때문에 진짜 음부에 처한 심판으로 고난인지?

 

다른 사람은 속여도 자기 자신은 속일 없으니, 진짜 그런 고난이 왔는지 본인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본인도 모를 있다는 것이 함정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죄가 없고 가까운 사람의 때문에 같이 고난을 받고 있다고, 그래서 본인은 십자가의 길을 가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본인 자신에게도 나귀와 같은 교만의 문제가 있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래도록 신실한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유대인들처럼 교만의 무덤을 지어온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과연 나는 하늘에까지 높아질까? 음부에까지 낮아질까? 그걸 아는 분은 심판주이신 예수님뿐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나는 영(0) 자리에 섭니다.

 

아무리 오래 신앙생활을 한들 플러스(+) 자리에 있다고 자신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이너스(-) 자리에 있는 아닐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매순간 영(0)으로 서는 마음의 진심을 예수님만은 아실 거라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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