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마태복음 11장 16절~17절)
‘세대’라는 말의 원어는 ‘게네아’로 ‘뿌리가 같은 한 족속, 동시대 사람들, 30년으로 끊어지는 한 기간’ 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비유할까’라는 말은 당시 랍비들이 사람들을 교육할 때 흔히 사용하던 말로, 원어는 ‘호모이오소’로 ‘무엇을 닮게 하다, 비교하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익숙한 랍비들의 교육 방식을 사용하여 영적인 지혜를 일상생활의 모습에 비교하여 쉽게 깨달을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라는 말에서 ‘장터’의 원어는 ‘아고라’로 원래 ‘회합’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해하는 ‘시장’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이 드나들면서 대화하는 공적인 장소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물론 그곳에서 상거래가 일어나기도 했지만, 예수님은 특히 바쁜 사람들의 모습보다는 무관심 속에 놓여 있는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이에 비유하셨습니다.
말씀 속에서 아이들은 “제 동무를 불러” 어떤 놀이를 제안하고 있습니다.
먼저 피리를 불어 흥겨운 결혼식 놀이를 하자고 합니다. 피리와 춤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헬라인, 로마인들도 결혼식과 같은 잔치집에서 흥겨움을 북돋우기 위해 즐겼던 놀이입니다. 하지만 동무들은 이 놀이 제안에 응하지 않아 춤을 추지 않습니다.
다시 반대로 슬피 울면서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동무들은 이 놀이에도 응하지 않아 가슴을 치는 반응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는 철저한 무시와 무관심과 불일치를 의미합니다.
어른들의 바쁜 일과에서 무관심하게 방치된 아이들은 자기들끼리도 서로 불일치하고 모순되는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놀이를 할지 일치되지 않고 한 가지 놀이로 결정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 모습 속에서 이 세대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아이들이 제 동무에게 하듯이 상대방을 기쁘게 하기 위해 피리를 불고 춤을 추어도 반응하지 않고, 슬픔에 대해 애곡하고 울어도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 모습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무감각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요?
우선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입고 싶지도 않다는 개인주의가 가장 편리하고 쾌적하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남과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는 것은, 이 아이들의 비유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어주는 일로부터 시작되는데, 그렇게 하는 데는 적지않은 에너지가 소요됩니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들도 산적해 있고, 먹고 살기도 바쁜데, 타인의 즐거움과 괴로움에 동참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시간이 남거나 경제적, 정신적 여유가 있으면 우리는 자기 자신을 위한 여가를 즐기는데 더 집중합니다. 조금이라도 귀찮은 일이 생기는 것을 꺼려하기에 조용하고 편안한 시간을 더 좋아합니다.
편안하지만 외로운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는 인터넷이나 SNS로 온라인 관계를 맺습니다. 온라인 관계는 각자 원하는 별명으로 맺어지며, 상대방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온라인에서는 서로 채팅도 하고 원하는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감정 교류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 사람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채지 못한 채 한 엘리베이터 안에 타고도 모르는 사람으로 지나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기적 관계 속에 놓여 있다고 할 것입니다. 내가 필요할 때만 온라인 상에 들어가 대화를 나누고, 귀찮으면 나와버리면 그만이며,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필요가 없고, 실제적인 관계성은 맺지 않는 매우 편리하고 자기중심적인 관계를 편안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예루살렘을 보시면서 눈물을 흘리셨듯이 매우 통탄해 하실 것 같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이 땅에서 존재하신 이유는 바로 타인을 위해 죽어주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너희도 이같이 하라고 말씀하시고, 제자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타인을 위해 죽어주지는 못할망정 타인의 기쁨과 슬픔에 동참하며 그리스도처럼 위로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일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기독론적으로 이 말씀을 해석하자면, 아이들의 피리와 춤은 그리스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을 기뻐하는 축제의 소리요, 아이들의 애곡하는 소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에 대해서 무관심한 사람들의 모습을 비판하신 것이라고 해석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그런 해석에만 머물면 예수님의 오심과 죽으심을 영접하고 주님으로 모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더 이상 해당되지 않는 말씀이 되고 맙니다.
마치 말씀을 졸업한 것처럼 자신에게 해당되지 않는 구절이 있다고 믿는 이의 교만을 예수님이 기뻐하실 리가 없습니다. 말씀은 언제나 새롭게 우리에게 의미를 전달하고 있고, 우리는 그 말씀을 시원한 생수로 늘 마시는 심령이어야 합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해도 내 안에 냉랭한 무관심이 가득하다는 것을 부인할 만큼 당당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인간관계의 복잡다단한 감정들이 얼마나 귀찮은지, 얼마나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지 다들 공감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기로 작정한 사람은 그 피곤하고 귀찮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때로는 무겁고 때로는 어리석은 것 같아도 타인의 웃음에, 타인의 눈물에 반응하고 가엾이 여기며 잠시라도 기도해 줄 수 있는 마음을 예수님은 기뻐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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