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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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by 브린니 2020. 7. 21.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마태복음 11장 11절)

 

말씀은 이단 교파에서 이단 교주를 높이기 위해 세례 요한도 실패자요, 작은 자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구절입니다.

 

몰래 이단 교파에서 성경공부를 하던 자매와 묵상모임을 하던 부분에 대한 이해가 이상하게 꼬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꼬치꼬치 캐물었더니 결국 그곳에서 성경 공부를 적이 있음을 실토했습니다.

 

그만큼 구절은 잘못 해석하기 쉽고 오해하기 쉬운 구절인 같습니다.

 

우선 예수님께서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라고 운을 떼신 것만 보아도 요한의 권위를 확고하게 세워주시면서 동시에 한계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보여주시고자 것임을 있습니다.

 

먼저 요한의 지위와 역할, 권위를 세워주시기 위해서 여자가 낳은 중에 그보다 이가 없었다고 말씀하십니다.

 

여자가 낳은 직역하면여자들에 의해 태어난 뜻합니다. 이는 욥이 사용했던 표현으로 죽음과 고통 아래에 있는 모든 인류를 일컫는 말입니다.

 

성경은여자들에 의해 태어난모든 인류에 비해 예수님은 여인에게서 나신 ’(3:15, 4:4)라고 표현함으로써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류 중에서 세례 요한보다 이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는 요한이 인격이나 종교적 지위나 권능에서 다른 선지자들보다 뛰어나다기보다는 예수님의 바로 앞에서 길을 예비한 자로서 가장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이 근접해 있다는 뜻입니다.

 

구약의 뛰어난 선지자들은 시대적으로 위치에서 삶과 마음과몸을 바쳐 하염없이 예수님의 오심을 고대하고 고대하였지만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심지어 예수님이 오시기 바로 직전에 선구자로서 요한이 나타날 것까지도 예언하였습니다.(40:3, 3:1) 바로 점에서 요한이 다른 선지자들에 비해서 가장 자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역시 여기에그러나 넣으셔서 인류 중에 가장 자인 그도 천국에서는 작다고 하십니다.

 

천국은 메시아 예수님이 통치하는 곳으로 시간적 공간적 제약이 있는 땅과는 다른 초자연적인 나라입니다. 땅에서 이미 천국이 임하였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땅에서 진정 천국을 누리는 자들은 땅의 삶의 제약에 의해 지배되지 않습니다.

 

비록 육신이 있어 고통스럽고 가시덤불 같은 고난이 있지만, 그것 때문에 영원한 나라에 대한 소망을 잃지는 않습니다. 다만 흠모하는 그리움의 슬픔이 있기는 하나 그것은 소망 때문에 생기는 그리움이므로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 됩니다.

 

하나님 나라에서 사는 사람은 땅의 고난 속에서도 신적 영광에 참여하여 사람으로서는 견딜 없는 미움과 고통과 원망 속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습니다.

 

바로 영광스러운 예수님의 나라가 임하려면 십자가 사건을 통과해야 합니다. 피흘림으로 죄의 장막이 찢어져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천국을 선포하고 회개하라 외치기만 했을 뿐,  십자가 사건을 경험하지 못한 요한은 헤롯에 의해 잘리고 말았으니, 그는 후대 사람들보다 일을 보지 못한 것이며 영광을 함께 누리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의미를 알게 이들은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아로서 땅의 억압에서 해방시켜 육적인 자유를 주는 그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담당하심으로 영원한 자유를 주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께오실 그이가 당신이냐?” 물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구속사에 대한 이해의 관점에서 요한은 십자가 이후의 사람들보다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요한보다 자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사함을 받았다고,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함으로 죄에서 자유를 얻었다고 들어왔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죄에서 자유하십니까? 우리의 눈이 부끄럽고 우리의 신념이 부끄러울 만큼, 세상에는 잘못된 믿음에 기인하여 신앙생활을 한다면서도 부끄러운 죄를 지어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이들이 많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계시가 완성되었고 천국이 임하였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이렇듯 불완전해서야 어디 예수님 말씀처럼 요한보다 크다 자신 있을까요?

 

계시가 완성되었다는 기쁜 사실이 도리어 우리의 발목을 묶는 족쇄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경의 마지막 장인 요한계시록 22 18~19절에는 성경 외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제하면 재앙이 임하며 사람을 생명책에서 지워버릴 거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미 모든 깨달음이 끝났고 이상 궁금해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알고 있다는 , 모든 진리는 이미 우리 것이고, 내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같습니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태어나서 자라면서 지혜가 자라고 예수님을 알아가는 깨달음이 쌓여가는 것은, 마치 생명에게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시 쓰여지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이 태어나 자라면서 무지의 단계에서 죄를 거쳐 사함을 받고 십자가를 영접하며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고 마침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기까지 희생하며 살아가는 과정은, 마치 무지의 상태에서 창세기가 쓰여지고 내적 이기심으로 치고받고 싸우는 사사기와 열왕기를 거쳐 하나님을 경시할 만큼 죄가 극심한 말라기를 지나 인생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십자가를 보여주시고 새롭게 거듭나 제자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과 같습니다.

 

이는 평생을 거쳐 깨달아 알아가야할 여정이고 순례입니다. 계시가 완성되었다고 해서 한 개인에게서 순례의 길이 단축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요한의 삶에서는 순례의 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클라이맥스가 없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예수님의 선지자이면서 예수님의 제자인 것처럼 광야에서 희생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 삶의 순례 길에는 이미 십자가가 붉게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십자가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순례 길을 걸어본 것처럼 교만합니다. 안다는 생각에 열심히 나아가지 않음으로 제자리걸음을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언제까지 젖만 먹을 거냐고 탄식했나 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정말 요한보다 나은 자가 되려면 십자가 사건을 경험한 이후의 삶을 사는 사람다워야 합니다. 사건을 사람은 피가 온몸에 묻어 있어야 합니다.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하셨고 그들의 죄까지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사람에게, 진정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웃음 한번 지어주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좁디좁은 마음 상태를 들여다 봅니다.

 

예수님이 요한보다 낫다고 하신 말씀 앞에 부끄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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