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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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by 브린니 2020. 7. 16.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마태복음 11장 2절~6절)

 

예수님 당시에 요한만큼 예수님에 대해서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길을 미리 예비하여 회개하라고 외쳤고, 직접 예수님께 세례를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감옥에 갇혔을 , 과연 자기가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하며 세례를 사람 예수가 자신이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했고,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맞냐고 물었습니다.

 

우선은 그의 간절한 기다림의 마디가 가슴을 울립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그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평생을 걸고 목숨을 걸고 삶의 모든 것을 걸고 기다리는 , 요한의 삶의 이유와 목적은 오직 구원자 메시아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길을 예비할 선지자의 사명을 받아 태어난 그도 예수님을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이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합니다.

 

예수님이 누구신가, 그분이 하시는 일은 정확히 무엇이며, 그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관한 계시는 한꺼번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만약 요한에게 계시가 한꺼번에 주어졌다면 그가 예수님이 과연 그분이냐고 물었을 리가 없습니다.

 

요한도 몰랐다면 다른 누구도 모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때는 예수님의 사역이 완성된 때가 아니고, 신약성경이 없었으니 요한이 모를 수밖에 없었고, 지금은 신약성경이 완성되었으니 우리는 알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예수님의 사역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으시는 것이었고, 이야기를 적어놓은 신약성경이 완성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사역의 깊은 의미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고 있다고 자신할 있을까요?

 

계시가 어느 정도 열릴 것이며, 보일 것이며, 우리에게 전해질 것인가 하는 문제는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세계 속에서 무한하게 계시는 그분의 생각과 하시는 일을 우리 힘으로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마치시고 승천한 이후에도 예수님에 관한 깨달음은 제자들에 의해 기록되고 전파되면서 끊임없이 발전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교리를 정리해놓은 사도신경은 열두 제자들이 작성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초대교회에서 세례를 주기전에 문답에 사용함으로써 발전하였다고 200년경 로마의 <사도전승> 쓰여 있습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사도신경의 본문은 3,4세기 로마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하며, 그것이 발전하면서 최종 형태는 6세기 또는 7세기 프랑스 남서부 지방에서 확립되었습니다.

 

이것이 세례때 사용되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3(1198~1216) 서로마 가톨릭교회에서 공식 진술로 인정하였습니다.

 

짤막한 사도신경 하나도 1,200년의 시간을 거쳐 발전해 왔다는 것을 있습니다. 그것이 확정되기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서로 논쟁을 하는 가운데 계시가 발전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모든 계시가 열려 우리가 예수님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누가 감히 확신할 있을까요?

 

계시의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계시의 발전 과정은 인간의 이성을 초월한 것이어서 우리는 자기가 알고 있다고 믿는 것에 의해 걸려 넘어져 실족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인 계시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을 넘어서기에 우리가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한계성을 드러낼 뿐입니다.

 

여기에 우리 신앙의 오류가 놓여 있는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 기독교 신앙은 너무나 대중적인 가지 교리로 간략히 표현되고, 단순한 질문과 대답으로 그가 믿음이 있다고 인정되고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자녀로 선포됩니다.

 

그리고 그는 구원을 얻었다고 믿게 되고,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기보다는 사람들과의 신앙생활에 매진하게 됩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신앙생활의 의무를 다하기 열정을 쏟게 됩니다.

 

과연 간단한 교리로 우리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다고 자신할 수가 있을까요? 오히려 단순한 사영리로 자기 신앙을 확신하려 , 우리의 사고는 단단한 틀에 갇히게 되고, 틀에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틀린 것으로 간주하게 됩니다.

 

오히려 판단과 의심이 더욱 늘어나고 깊이 깨닫기 위하여 질문하는 자에게마땅히 품어야 생각 이상을 품지 말라 권고하며 계시를 갈구하는 마음을 위험하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구하라, 두드리라, 찾는 자에게 성령을 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음에도 묻지 못하도록 하고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묻는 요한에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십니다. 당신은 요한이 알고 있었던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 맹인, 나병환자, 가난한 , 심령이 죽은 자들을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이야기해 주십니다.

 

우리는 더욱 예수님께 질문해야 합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셨습니까? 당신의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다 알고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더 계시가 열리기를, 더 예수님에 대해서 알게 되기를, 내  삶 속에서 어떻게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는지 알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또 질문하고 또 질문해야 합니다.

 

요한이 이미 예수님께 세례를 정도로 확신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히는 환난이 일어나자 마음속에 괴로움이 사무쳐 예수님이 오셨다면 과연 이럴 있나 하고 답답한 마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제자를 보내 예수님께 질문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삶의 어려운 문제 속에 갇혀 괴로워하고 신음할 자신의 믿음 없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과감히 예수님이 구원자 예수님이 맞다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며, 내가 어떻게 하기를 바라시냐고 물어야 합니다.

 

질문을 한다고 답이 오냐고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임이 육체로 계실 때는 답을 들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들을 수 없어서 답답하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질문을 던지는 그 끈질긴 나날들이 바로 기도의 나날들이며, 그 기도의 나날들을 인내로 살아가는 중에 반드시 환경과 사람과 깨달음을 통해서 답을 주십니다. 그 답들은 대개 예수님의 성품처럼 온유하며 겸손하며 아름다운 것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감옥에 있는 요한이 제자를 보낼 있는가 하는 부분에 대해서 의문을 던지는 학자들이 있다고 합니다. 요한이 갇힌 감옥은 요새여서 다른 이가 요한을 만날 없었다는 의견을 내놓은 학자도 있습니다.

 

정황을 우리가 정확히 수는 없으나 그가 어려움을 뚫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며 가서 물어보라는 뜻을 전했다는 것은 고도의 노력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제자들 앞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해놓고, 다시 가서 맞는지 물어보라는 것은 스승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닌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노력을 요한은 겸손하게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질문이 요한에게서 제자에게로, 제자에게서 예수님에게로 전해지는 과정이 어려웠음에도 그는 집념을 가지고 예수님께 대답을 들어야만 만큼 절박하고 간절하게 오실 그이를 그리워하고 사랑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런 절박함과 간절함이 있어야겠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당신의 삶에 들어오시는 것이 그리도 간절하게 그립고 절박하게 원하는 일인지,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아야 때입니다.

 

그저 다람쥐 쳇바퀴 듯이 고답적인 신앙생활을 함으로써 마음속의 절박함은 잊어버린지 오래라면, 예수님과는 별개의 일상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틀에 박힌 바쁜 신앙생활 속에 단단하게 굳어진 그만큼의 계시가 전부라고 믿고 있다면, 나로 하여금 예수님을 있게 하는 빛나는 계시를 가로막아 실족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실 그이, 예수님에 대한 요한의 절박한 그리움과 사모함에 대해 오늘 다시 생각해 봅니다.

'내 안에도 과연 그런 사랑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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