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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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by 브린니 2020. 7. 14.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 10장 38절)

 

십자가는 로마의 사형 도구로,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서 거기에 박혀 죽습니다.

자기의 사형 도구를 메고 간다는 ! 그것처럼 참혹한 일이 있을까요?

 

커다랗고 무거운 나무를 메고 뙤약볕 아래를 걸어갈 번이나 쓰러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합니다. 수만 있다면 나무를 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을 것입니다. 도착지에 다다르는 발걸음은 죽음을 향한 길인데, 자신을 죽일 사형 도구까지 어깨에 메고 가야하다니, 잔인하기 짝이 없습니다.

 

참혹한 일을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라고 하십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오라고 말입니다.

도착지에 다다르면 죽어야 하는 길을 걷지 않는 자는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다고까지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삶의 길을 걸으면서 때때로 십자가처럼 무겁고 고통스런 희생을 감내하는 인내의 순간을 살기도 합니다. 그럴 우리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응분의 보상을 받을 거라고 기대합니다.

 

그런데 만약 도착지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것이 오히려 무거운 박혀 죽는 것이라면 과연 어떠한 소망을 품을 있을까요? 그렇다면 무거운 짐을 메고 걸어가는 길이 너무나 무가치하다는 생각에 삶의 희망을 잃게 됩니다.

 

우리를 궁극적으로 힘들게 하는 것은 현재의 고통이 아니라 미래의 소망 없음이니까요. 소망이 있다면 현재를 견딜 있지만, 소망이 없다면 현재의 인내는 무가치해집니다.

 

가장 견딜 없는 것은 바로 현재의 견딤과 살아감이 무가치하다는 것에 대한 고통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점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견딜 가치도, 이유도 없어 보이는 시련에 대해서 말입니다.

 

건강하고 똑똑해서 미래가 촉망되던 젊은이에게 어느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찾아와 휠체어를 타지 않고는 움직일 없게 되었습니다.

 

이십대에 장애를 갖게 그는 오십 년이 지나도록 장애인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는 탄식했습니다.

"아무런 가치도 없이 계속되는 고통, 무가치한 삶이여!"

 

우리는 어쩌면 이와 같이 삶의 무가치와 싸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면서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물었고, "가장 높고 의미있는 자라고 하더니 가장 별볼일 없고 무가치한 자구나" 하고 침을 뱉었습니다.

 

우리가 삶을 견디지 못하는 순간은 아마도 우리의 삶이 무가치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2 대전 이후 많은 철학자들이 실존주의에 몰두하였습니다. 존재의 이유를 찾을 없고 허망한 삶을 지속할 이유를 찾지 못해 자살만이 유일한 탈출구라고 여기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장 무가치한 삶을 살았다고 있는 거지 나사로가 천국에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가 천국에 있다는 것은, 지상의 삶이 무가치하지 않았음을 증명합니다. 하나님은 달란트라도 땅에 묻어둔 자를 용납하지 않으셨으니까요.

 

휠체어를 타고 평생을 살아간 젊은이는 마침내 칠십대 노인이 되어 깨달았습니다. 자신의 고통은 누군가의 고통을 대신하는 것이었다는 연결고리를 말입니다.

 

죄가 가시와 엉겅퀴가 되어 자라나는 땅에서 누군가는 가시에 찔려 사고를 당하고, 장애를 입고, 유전적 질환을 가지고 태어나며, 불치병으로 고통받게 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이유 없는 하반신 마비 증상이 자신에게 오지 않았다면 다른 누군가에게 갔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마도 나사로가 거지가 아니었다면, 다른 누군가가 거지가 되었을 것입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누군가는 많이 갖고 누군가는 가진 것도 빼앗기는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나사로는 거지로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고통스런 삶을 대신하는 대속의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존적 개별자로서 외따로 고독하고 근거없고 이유없고 가치없는 삶을 살다가 죽는 같지만, 사실은 모두 연결되어 있어 기쁨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아픔은 타인의 아픔을 대신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영원하신 대속자 예수님이 우리를 살리기 위해 대신 죽으셨듯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는 모두 예수님처럼 누군가를 대신하여 대속하는 삶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전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조차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저 일을 열심히 하는 같지만, 신발 만드는 사람의 헌신은 다른 이의 발을 보호하고, 거리를 청소하는 사람의 헌신은 다른 이를 건강하고 쾌적하게 만듭니다.

 

그저 내야 세금을 뿐이지만, 그것으로 굶주리는 누군가는 먹으며, 월급 받기 위해 하는 일이지만 일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편리를 누립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사람들 간의 연결고리에 대해 인정치 않는 같습니다. "타인은 감옥"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동시에 틀린 말이기도 합니다.

 

타인은 내게 무거운 짐이기도 하지만, 내가 살아가야 이유이기도 하며, 내가 살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기도 합니다.

 

내가 쉬는 순간, 내가 먹는 음식, 내가 입은 , 내가 살고 있는 , 모든 안에 내가 치른 돈의 액수로는 턱없이 모자랄, 내가 모르는 희생이 들어 있습니다.

 

인간과 인간, 자연과 인간 사이의 연결고리를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나를 지으셨으며, 하나님의 대리인으로서 인간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서로가 서로를 대속하고 있다는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연결고리 안에서 갖게 되는 책임과 의무를 받아들일 우리는 예수님처럼 타인을 대속하는 십자가를 있게 됩니다. 그것이 본래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본래의 인간이 있습니다.

 

본래의 인간이 되어야 예수님의 공동상속자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는 자만을 합당한 자라고 여겨주겠다는 선택의 말씀이 아니라 그런 인간이야말로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모습을 회복한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매우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말씀입니다.

 

가장 무가치해 보이고 억울해 보이는 시련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의무는 우리가 지기에 무척 버겁고 힘들게 느껴지지만, 의무가 우리의 영혼을 높은 곳으로 고양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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