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마태복음 10장 32~33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을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단순히 사람들 앞에서 “나 예수님 믿어”라고 시인한다고 해서 정말 예수님을 믿는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때는 정말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다고 하면 잡혀가서 사자밥이 되었으니, 입술로 시인한다는 것이 엄청난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 앞에서 예수 믿는다고 시인한다는 것은 그런 정도의 무게감을 갖지는 못합니다. 그저 마음으로 믿어 입술로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너무나 값싼 믿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나를 시인하면(호몰로게세이 엔 에모이)”라는 말을 직역하면, “내 안에서 시인하면”이라는 뜻으로 ‘예수님과 연합된 상태’에서 고백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한 “사람 앞에서”라는 말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과 생명의 연합을 이룬 존재로서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시인된다는 것입니다.
이 삶의 모습을 통해서 관계 속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아무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한다 해도 그 삶의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영으로 그리스도의 교훈을 생활로 표현하지 못한다면,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 사람들 앞에서 시인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기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의 삶이 그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를 보여줌으로써 사람들 앞에서 시인되는 일입니다. 이는 무섭고도 중대한 사실입니다.
나의 믿음은 내 말로 입증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 앞에서 증명된다는 엄중하고도 무거운 진실을 안다면,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정적으로 찬양을 하면서 “예수님, 사랑해요. 예수님, 당신은 나의 주님이십니다.”라고 고백한다 한들 그 믿음을 예수님이 인정하실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명시해 주십니다.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의 교훈으로 살아감으로 사람들 앞에서 시인된다면,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시인하실 거라고 말입니다.
과연 예배 때 눈물을 흘리며 부르는 찬양과 기도만큼 실제 생활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는 희생의 십자가 흔적이 삶 속에 얼마나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의 의미는 사람들 앞, 즉 삶의 현장에서 주님이 주인이 되지 않는 삶을 살아 세속적인 관심과 이익을 더 중시하며, 지상의 가치를 더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으면 사자 밥이 되는 시대도 아닌데, 굳이 현대인이 예수 믿는다는 사실을 부인할 필요도 이유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의 의미를 단순하게 받아들이면 “나는 사람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적이 없어”라고 생각하고 마음 편하게 넘어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진짜 의미를 생각하면 우리의 마음은 몹시 불편해집니다.
과연 삶 속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면 예수님이 주인인 사람처럼 보일까, 혹시 내가 세상적인 가치를 좇는 모습을 많이 보이지 않았나, 세속적인 명예와 부를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나, 과연 나는 정말 세속적인 가치보다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더 추구하고 살고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폐부를 찌르고, 이 말씀 앞에 진심으로 깨끗하다 생각할 수 없게 됩니다.
즉, 이 말씀은 베드로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을 부인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적인 부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전 생애와 인격이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바르게 좇았나, 혹시 세상 것을 추구함으로써 의도치 않게 결국은 예수님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가, 하는 매우 날카로운 칼과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예리한 검과 같이 우리를 벤다고 한 것처럼, 이 말씀 앞에 자신있는 태도를 보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판단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 있기에,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해서 증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때 어떤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어 변호사가 되시고 증인이 되어주셔서 시인해 주시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심판자가 되셔서 부인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엄중한 심판의 말씀 앞에서 그저 우리는 입술로 시인했으니 되었다라고 어떻게 자신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생각하면, 예수 믿는다는 것은 참으로 좁은 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위태롭기도 하고, 지금 잘 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그래서 자신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일 때도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또한 동시에 “나의 멍에는 쉽고 가볍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내 안에서 자라나는 욕심을 버리고 예수님께 맡기면, 오히려 쉽고 가벼운 것이 또 사실이기도 합니다.
세상 것들을 향한 마음은 따지고 보면 다 욕심입니다. 욕심이 아닌 부분은 일용할 것이므로 주님이 채워주십니다.
일용할 수준이 아닌, 그 이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길 때 그리스도인의 삶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이 되어, 삶의 현장에서 사람들 눈에 그리스도인이 아닌 똑같은 세속인으로 보이고 맙니다.
내 삶에 존재하는 가시덤불에 찔릴 때 ‘아얏’ 하고 소리를 내더라도 다시 상처를 주님께 보여드리며 주님께 맡기고, 순간순간 자신이 비참해서 조금만 더 가졌으면 하는 것이 있을 때도 주님께 아뢰고 주시지 않으면 필요한 게 아닐 테니 안 주시면 포기하고,
매일의 일상이 버거워 너무 힘들어도 딱 오늘 할 일만 생각하며 묵묵히 어린 양처럼 정직하게 살아가면, 어느새 사람들이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알겠다”라고 시인해 줄 날이 올 것입니다.
그리하여 어느 날, 돌아보면 살아있었던 모든 순간들에 주님께서 함께 하셨다, 가장 힘든 순간에도 함께 하셔서 내게도 불에 덴 것처럼 그리스도의 흔적이 조금은 남게 되었다,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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