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들이 떠나매 예수께서 무리에게 요한에 대하여 말씀하시되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들은 왕궁에 있느니라 그러면 너희가 어찌하여 나갔더냐 선지자를 보기 위함이었더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 더 나은 자니라 (마태복음 11장 7절~9절)
예수님은 참 다정다감한 분인 것 같습니다. 동시에 꼭 필요한 정곡을 찌르십니다.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혔을 때, 과연 자신이 세례를 준 예수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맞는지 회의가 들어 제자들을 보내 예수님께 오실 그이가 당신이냐고 물어본 일 때문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요한이 예수님을 두고 세례를 줄 때는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맞다고 했다가 다시 자기가 감옥에 갇히자 예수님이 맞는지 회의하는 모습을 통해 요한의 예언에 대해서 불신하는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막상 요한은 명예가 훼손되는 것에도 불구하고 겸손하고도 용감하게 예수님께 물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런 요한을 바라볼 때 '왜 이랬다 저랬다 하지? 도대체 요한의 예언을 믿어도 되는 거야?'라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이때 예수님은 요한의 훼손된 명예를 되찾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많은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알고 그를 보려고 광야에 나아가 요한의 회개하라는 선포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요한을 만나러 갔던 이유가 무엇인지 돌아보라고 정곡을 찌르며 말씀하신 것입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라는 말씀에서 우리는 요한을 만나러 나간 사람들의 마음속을 꿰뚫어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대가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처럼 요한이 이랬다저랬다 흔들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강하게 물어보심으로써 거꾸로 요한은 절대로 그런 갈대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또 “부드러운 옷을 입은 사람이냐?”라는 말씀에서 ‘부드러운’은 ‘말라코스’라는 말로 부드럽다는 뜻 외에도 ‘사치스러운, 방탕한, 나약한’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부드러운 옷’은 왕실이나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이 입는 린넨 실로 만든 고가의 장식용 옷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미 요한이 약태 털옷을 입고 가죽띠를 띤 검소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요한이 얼마나 고난의 인생을 살면서 확고한 신념으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였는지 기억하게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사람들이 다시 자신들의 의심을 추스르고 요한의 삶의 진정성에 대해서 기억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은 다시 그렇다면 너희가 선지자를 보러 나간 것이냐라고 물으시고, 요한은 너희가 생각한 선지자보다 훨씬 더 나은 자였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나은 자’의 원어는 ‘페리쏘테론’으로 ‘넘치는, 능가하는’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 낱말은 그 자체로 비교의 의미가 있기에 ‘더욱 탁월하다’는 뜻을 강조해줍니다.
구약의 말라기 이후에 400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기에 사람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줄 선지자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나타났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요한은 훨씬 더 큰 선지자로서 그리스도 예수의 직접적인 선구자였음을 나타내 보여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바르게 다시 세워주시고, 요한의 지위와 명예를 되찾아 주십니다.
다정다감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강하고도 부드럽게 우리를 위로해 줍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때로 타인 앞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게 될 때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우리가 갈대처럼 이랬다저랬다 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럴 때는 나 자신이 스스로 믿음 없음을 탄식하게 되고, 뭐가 옳은 것인지 순간 헷갈리기도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 마음속의 진심을 아십니다. 세상에는 많은 훌륭한 목사님들과 신학자들이 있고, 우리는 우리의 신앙 발전 속도에 따라 한때는 어떤 신앙적 스승 밑에서 은혜를 받고 열심히 배웠다가, 그 가르침의 틀 안에서 웃자라 그 이상의 가르침이 필요할 때는 또 다른 스승에게서 배우기도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전에 배운 것이 너무 작아보이고 이전의 스승이 가지고 있었던 도그마를 발견하기도 하며, 그 틀이 너무 협소하다고 느끼기도 하여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 모습을 다른 사람이 보면 철새처럼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는 것처럼 보이고, 한때는 신앙적 스승으로 흠모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돌아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도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선지자 중의 그 누구보다도 더 크다라고 말씀하신 세례 요한조차도 예수님에 대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것과 달라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 여쭈어 보아야 할 정도였다면 우리는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알기를 갈망하고 찾을수록 더 여기저기 신앙적 스승을 찾아서 순례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론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스스로 성경과 주석책과 관련 도서들, 지도 등을 보면서 예수님에 대해 자립적으로 알아가는 능력이 생기기도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마치 학생들이 어른이 될 때까지 수많은 선생님을 만나며 다양한 공부를 하듯이 그렇게 이리저리 찾아헤매게 됩니다.
때로 오랜시간 동안 한 스승 밑에서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라면 그 사실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지만, 도리어 너무 틀에 박힌 가르침에만 매몰되지는 않았나 돌아볼 필요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천로역정>에 나오는 ‘믿음’처럼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가는' 오묘한 순례의 길을 걷는 삶을 사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보려고 이 믿음의 광야로 나갔을까요? 신앙생활이란 결코 부드러운 옷을 입고 왕궁에 사는 것처럼 편안한 것이 아닙니다. 남들은 그저 쉽게 지나칠 일도 마치 거친 옷을 입고 가죽띠를 띠고 형형한 눈빛으로 매섭게 자신을 성찰하는 사람처럼 신앙 양심에 빗대어 더 온전한 방식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애써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세례 요한처럼 끊임없이 회개하라고 외치고, 타인에게는 끊임없이 그의 못된 허물을 덮어주고 사랑으로 대속해주고 죄의 결과로 지는 짐을 같이 져주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광야로 믿음의 순례 길을 떠나면서 우리는 이 한 마디의 질문을 내내 가슴에 품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무엇을 보려고 광야로 나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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