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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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by 브린니 2020. 7. 26.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마태복음 11장 18~19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으면 어떤 의견에 대해서 동조하는 경향이 생깁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도 대체로 대세에 따르는 것이 집단의 미덕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통의견이 아름답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면,  집단의 전체 수준은 심히 불행하게도 점차 하락하게 됩니다.

 

세례 요한이 철저한 금욕주의적 생활을 하면서 나실인의 규례를 따라서 포도주와 소주를 마시지 않고, 광야에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면서 사람들의 초대에 응하지 않으며 선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고, 교만한 유대인들은 요한이슬픔의 귀신 사로잡혔다고(F.R. Fay) 폄하하였습니다.

 

그러더니 이제 예수님이 오셔서 일반 사람들과 똑같이 음식을 먹고 당시 관습대로 포도주를 마시자 이번에는 예수님에 대해서 먹기를 탐하는 대식가이며 포도주를 좋아하는 술꾼이라고 매도하였습니다.

 

또한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하는 모습에 대해서도 비판했습니다. 죄인을 가까이 하지 않고 스스로 정결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의 외식과는 달리 예수님은 소외되고 죄로 인해 버려진 사람들에게 복음을 주시므로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하시는 것임에도 의미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습니다.

 

신앙이 자기의 의로움을 향하여 매진하는 자기중심적인 것이 되면, 타인을 위하여 죽으러 오신 예수님의 복음의 본질을 잃게 되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불가능해지고,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지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뒤에지혜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지혜는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 참으로 중요한 것이지혜 같습니다. ‘지혜 욥기나 잠언에서 인격화되어 표현되고 있을 만큼 생생하고 살아 있는 것입니다.

 

유대 전승들에서는지혜 하나님의 뜻을 말해주는 대리자로서 하늘에 있는 반신반인적인 존재로까지 표현되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지혜 그리스도 예수님 가리키는 말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 지혜는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의 역사를 예비하신 하나님의 경륜과 뜻과 능력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지혜는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씩 깨달아가는 만큼, 하나님의 지혜가 조금씩 임하여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유대인처럼 타인에 대해서 매도하고 폄하하는 식의 말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조금이라도 임하였다면 타인의 모습에 대해서 최대한 좋은 점을 발견해주려고 애쓸 테지, 그렇게 부족하고 좋지 않은 모습에 초점을 맞추어 공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말과 행동을 보면, 그가 지금 신앙 안에 거하고 있는상대방이 느낄 있게 됩니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세상 사람들에게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는지 이해가 됩니다. 마치 당시 유대인들처럼 상대방의 행동에서 비난거리를 찾기를 좋아하고 집단 안에서 다른 소리가 나오는 것을 싫어하며 목소리를 내기를 서로 종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것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구절과 동일한 구절에서는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누가복음 7 35)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과는 달리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은 요한과 예수님의 삶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옳다고 평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실이 어떤 이들에게는 옳은 일이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잘못된 일이 된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옳다고 말하는 쪽에 것인지 틀렸다고 말하는 쪽에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인간의 삶에서 수학문제처럼 명백히 틀린 경우과 명백히 옳은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누구나 자기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그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충분히 들어주고 변론할 기회를 주며 이해해 보려 하는 것은 인간 세계의 법정에서도 행해지는 일입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이 삶 속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좋을까요? 컵에 물이 반쯤 들어 있을 , 어떤 이는 반밖에 없다고 하고 어떤 이는 반이나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뭐라고 하실까요?

 

물고기 마리와 다섯 개로 오천명을 먹이신 예수님은 틀림없이 반이나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실 것입니다.

 

타인을 향한 우리의 시선을 이렇게 따뜻하게 데울 수는 없을까요? 조금은 부족해도 조금은 마음에 들어도, 혹은 내게 좋지 않은 일을 했어도, 예수님을 닮아가기로 작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래도 따뜻한 눈으로 봐주고 용납해주고 좋은 점을 찾아내어 칭찬해 주면서 비판하기보다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것입니다.

 

유대인들을 보고 예수님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했는지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있을 같습니다. 철저한 자기 룰을 가지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틀렸다고 비판하기를 일삼는 그들의 좁은 마음, 차갑고 뾰족한 마음, 잣대를 들이대고 거기에서 벗어나면 잘라내려는 마음, 약간의 트집이라도 잡아 자기보다 못해야 편안해지는 교만한 마음, 그것이야말로 마귀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 포용함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담긴 지혜를 입는 사람들이 되어야 것입니다. 그럴 때에 지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하나님께서 나를 바라보시며네가 바로 아들이구나라고 불러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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