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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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묵상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by 브린니 2020. 7. 28.

*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태복음 11장 21~22절)

 

“화 있을진저”라는 말은 일종의 저주처럼 느껴져서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이 뭔가 어울리지 않고 듣기에 불편합니다.

 

그러나 이 말의 원어는 ‘우아이’로 숙명적인 절망이나 엄숙한 경고 또는 연민의 정을 표현할 때 쓰는 감탄사라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일종의 탄식이며 안타까움이 극도에 달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라신’은 가버나움에서 북서쪽으로 약 2마일쯤 떨어진 곳으로 추측됩니다. 예수님이 주로 사역하셨던 가버나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므로 이곳에서도 예수님이 많이 활동하셨을 것입니다.

 

‘벳새다’는 안드레, 빌립, 베드로의 고향으로 갈릴리 호수와 강둑에 위치한 곳이어서 역시 예수님의 손길이 많이 닿은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많은 권능을 행하셨는데도,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자 예수님은 연민의 정에 복받쳐 탄식하고 계신 것입니다.

 

‘두로와 시돈’은 팔레스틴 북부 지중해 연안의 항구도시로 구약의 선지자들은 바알 우상 숭배지였던 이 두 도시에 대해 종종 심판을 예언했습니다. 또 솔로몬은 성전 건축에 필요한 자재들을 두로 왕에게서 공급받았을 만큼 문물이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이 두 도시는 무역과 항해로 대단한 부와 향략을 누린 곳이었으며 우상 숭배 또한 많은 곳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차라리 두로와 시돈에서 권능을 행하였더라면 화려한 삶을 사는 그들이라 할지라도 회개하여 거친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애통했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으셨나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에 해당하는 문제라서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이들을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셨기 때문이라고 대답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인간을 지으시고 눈앞에 선악과를 두시어 자유의지로 하나님을 선택하기를 원했던 하나님은 인간의 모든 선택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모습들을 존중하시고, 그 틀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어가신다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상식과 인간의 관계들을 무시하고 단지 전지전능의 힘으로 행하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셔서 육체의 한계를 그대로 다 받아들이시고 그 안에서 복음을 전하신 것이니까요.

 

하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것은, 인간이 개미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인간이 의자가 된 것과 비슷하다는 비유를 들었습니다. 마치 생물이 무생물이 되는 것과 같은 정도의 낮아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탄식은 그 낮아진 밑바닥의 겸손으로부터 깊은 동굴을 통과하는 한숨처럼 길고도 뜨겁게 터져나옵니다. 그 한계 속에서 가장 먼저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할 사람은 가족과 이웃 사람과 마을 사람, 그 지역 사람입니다. 그것이 인간관계의 모습이니까, 인간이 되신 하나님은 그 관계성을 존중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미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서 배척받으실 것도 알고 계셨습니다.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속성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선지자가 나는 것을 견디지 못할 만큼 질투가 심하고 교만하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관계의 틀을 존중하시는 예수님은 먼저 관계의 동심원인 가족, 친지, 이웃, 지역민들이 사는 고라신과 벳새다에서 사역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하면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럴 것을 아시기에 더욱 탄식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이 마음을 찌릅니다. 죄된 인간의 속성 때문에 복음이 더 전해지지 않을 것이 뻔한 상황에서 인간관계의 룰을 따르셨기에 예수님은 돌에 맞고 모욕을 받고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인류 구원의 역사를 완성하실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두로와 시돈, 소돔에서 먼저 복음을 전해 그들이 회개하여 예수님을 따랐다면 십자가의 영원한 대속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앞서 던진 논리적 질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지고 오신 사명과는 무관한 일이 됩니다.

 

원죄 이후에 벌어질 인간사의 상식적인 흐름과 내면의 악한 흐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불러오도록 되어 있음을 선악과 사건 이후에 이미 하나님은 아셨고, 이 모든 경륜은 예정대로 흘러갑니다. 그 안에서 깊이 흐르는 것은 오직 예수님의 강물과도 같은 탄식입니다.

 

예수님 눈앞에 펼쳐지는 것은 단지 오늘만의 모습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시는 예수님의 눈앞에는 이미 심판날의 모습 또한 훤히 보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보고 그 권능을 보고도 회개치 않은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우상을 숭배했던 이방 도시의 사람들보다 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이들입니다.

 

때때로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보다 더 적은 죄를 짓고도 더 많은 지탄을 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 지도자가 죄를 지었을 때, 일반인이 같은 죄를 지었을 때보다 더 손가락질을 하고 욕합니다.

 

하물며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의로운 척은 다해놓고, 저런 죄를 짓다니......”라고 말하면서 가증스러워하는데, 하물며 예수님 당신은 어떨까요?

 

교회에 와서는 헌금과 봉사와 기도와 말씀으로 그리스도인인 척하면서 세상에서는 남몰래 죄를 짓고 있었다면, 예수님은 그를 바라보실 때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그 고통의 탄식에 귀 기울여봅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부르는가. 나는 네게 그토록 복을 주고 싶었는데, 내 살과 피를 다 주어 너를 살리고 싶었는데, 어찌하여 너는 화를 향해 달음질하는가. 어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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