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
너무나도 유명한 이 말씀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후 지난 2천여 년의 세월 동안 삶에 지친 이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동아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수고하고’의 원어는 ‘호이 코피온테스’로 현재분사 능동형의 명사적 용법으로 쓰여 스스로 많은 일들을 계속하여 피곤에 지친 상태를 말합니다.
‘무거운 짐진 자’의 원어는 ‘페포르티스메노이’로 현재분사 수동형으로 쓰여 다른 사람에 의해 무거운 짐이 계속 지워진 채 살아가 지쳐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즉, 수고하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 죄와 염려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살아가기 위해 지는 생활의 의무 때문에 지친 사람을 말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힘겨운 의무를 감당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학자들은 유대인들의 경우 무거운 짐을 진다는 것은 전통적으로 부여받은 율법과 전통의 짐 때문에 힘겨워하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 근거로 마태복음 23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자기만의 걱정과 염려, 생활을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노동의 의무로 인해 지치고 피곤합니다. 게다가 돌보아야 할 가족의 다사다난한 문제들 또한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그렇게 안팎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종교 지도자들은 더 짐을 얹어줍니다. 모세의 자리에 앉아 무거운 짐을 사람의 어깨에 지운다는 예수님의 비난은 꼭 과거 유대인들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일주일 내내 직장에서 시달리던 이들에게 유일한 희망은 주말의 달콤한 휴식일 텐데, 교회 생활을 열심히 하는 신앙인들은 대부분 그 시간을 교회에서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일학교 봉사나 교회 청소, 성가대 연습, 성경공부나 각종 소모임, 절기 행사 준비, 주일 점심식사를 위한 장 보기 등으로 토요일부터 바쁜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주일은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오전 예배와 식당 봉사, 주일학교 봉사, 성가대 봉사, 점심식사 후 오후 예배, 예배 후 선교회 모임, 교사 모임 등을 마치고 나면 저녁 때가 됩니다.
눈코 뜰 새 없이 주말이 지나가고 다시 월요일이 시작됩니다. 이런 신앙생활을 수십년 한 사람들은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는데, 점점 임직을 맡을수록 새벽예배에 나가야 한다는 무언의 압박을 받게 되고, 이제 새벽잠마저 포기해야 합니다.
또 각종 헌금은 어떻습니까? 세계에서도 부동산 가격이 비싸기로 손꼽히는 한국에서 교회 건축을 하려면 수십억, 수백억의 예산이 필요합니다. 우선은 은행 대출을 받아 교회를 짓고 건축헌금으로 은행 이자를 내는 교회들이 수두룩합니다.
이 건축헌금 역시 성도들의 몫입니다. 그 외에 십일조, 주정헌금, 감사헌금, 절기헌금, 선교회 헌금 등등 항목도 가지가지인 헌금들이 가득합니다.
비정규직이 정규직보다 더 많은 불안한 한국 사회, 세계에서도 의료보험이 잘 되어 있기로 유명한 우리나라는 그만큼 의료보험료도 비쌉니다. 또 국민연금이 의무화되어 있어 의료보험과 국민연금을 합하면 한 달 수입의 딱 십분의 일이 청구됩니다.
한국의 크리스천은 한 달 수입의 십분의 일은 국가에, 또 십분의 일은 교회에 내고, 그 외의 각종 헌금을 내고 나면 10분의 3 이상이 순식간에 없어집니다. 나머지 10분의 6이나 7로 자기 집도 마련해야 하고 자기 차도 마련해야 하고 자녀들도 양육해야 합니다. 사실 손에 꼽는 고액 연봉자가 아니면 수치적으로 이 모든 지출이 불가능한 수준입니다.
그래서 한국 교회도 빚이 많고 성도들도 빚이 많습니다. 빚이 많으면 그만큼 많은 이자가 지불됩니다. 어이없이 많은 이자를 지불하면서 쪼들리며 사는 한국 크리스천들은 너무나 불쌍합니다. 휴일의 쉼도 없이 평일에는 직장에서 주말에는 교회에서 계속해서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수고하는 이들이 경제적으로도 쪼들리며 살고 있으니 얼마나 지치고 힘든지요.
예수님이 보시면 예루살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셨듯이 우리를 위해서도 눈물을 흘리실 것입니다. 그런 성도들을 향해 예수님은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친히 부르시지만, 그 부름에 응답하는 이들은 스스로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이 아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이며 아이같이 순박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은 마지막 심판날의 영원한 안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상생활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누리게 될 거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 가기 위해서 교회에 다니는데 왜 더 짐을 지게 되는 것일까요? 혹시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습이 마태복음 23장 1절부터 4절까지의 말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라고 예수님께서 비난하신 말씀과 같은 모습이라면 참으로 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실 때 “내가”라고 강조하심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누구이며, 우리를 쉬게 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분명히 밝히십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은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혹시 간과하고 다른 것에 충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혹시 그 충성으로 인해 결국은 본인이 인정받고 싶은 자기중심적 신앙 안에 들어가 ‘자기 의’를 쌓으면서 마치 희생하는 것처럼 힘들어하는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분명히 예수님이라면, 우리를 쉬게 하시겠다는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그 말씀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쉼이 없으며 계속해서 지쳐 힘겹다면 뭔가 잘못된 게 있는지 철저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향하여 가고 있는 게 맞다면 마땅히 쉼과 안식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게 틀림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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