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 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자기나 그 함께 한 자들이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지 아니하였느냐 또 안식일에 제사장들이 성전 안에서 안식을 범하여도 죄가 없음을 너희가 율법에서 읽지 못하였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12장 1절~8절)
이 말씀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 밀밭 사이에서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벼 먹은 것을 보고 율법에 곡식을 손으로 비벼 먹는 것은 추수에 해당하므로 일을 해서는 안 되는 안식일의 규정을 범했다고 바리새인들이 따지는 사건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사무엘상 21장 1절에서 6절에 나오는 다윗의 일을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울에게서 피해 호위병 몇 명과 함께 도망치다가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아히멜렉이 주는 진설병으로 주린 배를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진설하는 12개의 떡은 오직 제사장만이 먹을 수 있는 것이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 떡을 먹은 것은 율법을 위반하는 행위였습니다. 또 이 떡은 방금 진설한 것이어서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에 다윗이 여호와의 전에 놓인 떡을 먹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무리하게 적용하는 바리새인들의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성경의 근본 정신은 율법에 사람을 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기본 관점은 “안식일이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전통의 유전을 사람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태도는 성경의 정신도 예수님의 마음도 아닙니다.
성경에 능통한 바리새인들이 성경에서 제사장 아히멜렉이 율법의 규정을 어기기면서도 다윗과 그 부하들에게 진설병을 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근본 정신을 알고 실천했어야 한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지적하고 계십니다.
또 예수님은 안식일의 근본정신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6절에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성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성전이란 한낱 예수님에 대한 예표이며 상징이고 일시적인 모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한낱 사람이 지은 건물이 아니라 진짜 성전인 예수님 안에서 임재하시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진짜 성전이신 예수님은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말씀을 다시 선포하십니다.
‘자비’의 헬라어 ‘엘레오스’는 고통받고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하고 구제한다는 뜻으로 마음 중심에 사랑과 헌신이 있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줍니다. ‘제사’는 ‘뒤시아’로 희생 제물을 태워 연기로 제사를 올리는 행위를 말합니다. 이 낱말에는 형식적이고 습관적이며 무의미한 종교 행위라는 의미가 강하게 내포되어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의 계명은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굶주려 밀 이삭을 비벼 먹은 것처럼, 자비와 제사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면 자비를 먼저 베푸는 것이 옳으며, 그렇게 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소홀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책망이기도 합니다. 율법과 전통에 대한 맹신은 사람에 대한 자비를 가립니다. 이런 태도는 호세아 시대 사람들이 피상적이고 위선적인 방식으로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기울였던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그들은 율법의 진정한 의미인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오늘날의 종교 지도자들조차 코로나 2차 대유행의 시점에서 전 국민들이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종교의식을 계속해야 한다는 전통에 매여 있는 일은 참으로 바리새인들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빈(Calvin)이 종교의식에만 관심을 갖는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모든 세대 사람들의 공통된 과오”라고 한 말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장로교 지도자들은 스스로 칼빈주의자라고 말하면서 칼빈의 이 말을 지금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궁금합니다.
마가복음 2장 27절에는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이 일시적인 굶주림도 아니고 전염병의 위험에 처해 있는 상황에서 마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예배를 강행하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성경공부를 하고 찬양을 하며, 심지어 숙식을 함께하는 수련회와 부흥회까지 한다는 것은 진정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는 행동이 맞는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랑케(Lange)는 예수님 자신이 신령한 안식이 되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즉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되며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야말로 안식일을 파괴하는 일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림자요 모형으로 지켜졌던 안식일의 의미를 참 자유와 평안으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시며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을 향유”할 수 있게 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안식을 향유”하는 안식일을 보내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특히 코로나로 불안이 가중된 지금 과연 안식을 향유하는 예배란 어떤 것이어야 할지 다시 모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다시 칼빈의 말을 고려해봅니다. 칼빈(Calvin)은 예수님께서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말씀은 안식일에 얽매이는 의무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켜주시는 권세를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며,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는 복잡하고 까다로운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 그 멍에를 대신 져주시는 예수님께로 와서 ‘안식과 쉼’을 얻으라는 의미라고 말하였습니다.
굶주려 배고픈 제자들에게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용납하신 예수님이 코로나19의 위험에 억눌린 우리가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정죄하실 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이 고통스런 현실에서 벗어나 주님 안에서 쉼을 얻는 것을 기뻐하실 것입니다.
호세아 시대에 율법주의자들이 저지른 잘못을, 예수님 시대에 바리새인들이 저지른 잘못을,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똑같이 저지르지 않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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