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마태복음 13장 10절~12절)
이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좋은 밭의 비유 뒤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린 씨앗이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 좋은 밭에 떨어졌을 때 생기는 결과를 말씀하신 후에 사람들이 돌아가고 남아있는 몇몇 사람들과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여쭈어본 내용입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이 물음이 가슴에 맺혀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이해할 수 없음에 수시로 답답해하며 가슴을 치고 그 해답을 찾아 여러 매체와 책을 뒤지며 뜻을 알려달라고 기도해본 사람은 이 물음의 절절함을 잘 압니다.
이 물음을 던진 사람들은 열두 제자만이 아닙니다. 군중들이 집으로 돌아간 이후에 늦게까지 남아 있던 소수의 사람들이 포함됩니다.
이들도 가정이 있고 해야할 일이 있는 사람들일 텐데도 모두가 발걸음을 돌릴 때 돌아가지 않고 끝까지 남아 기다리는 인내가 있었고, 예수님이 어디 계신가 찾는 연단이 있으며, 이해하지 못한 것을 제대로 알고 싶어 나아가 질문하는 적극적인 호기심과 궁금증이 있었습니다.
이토록 알고 싶어하고 깨닫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혹은 무언가를 사랑할 때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알고 싶어하고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그들이 이렇게 늦게까지 남아 예수님께 다가가 물은 것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증명합니다.
이에 예수님은 기쁨으로 화답하시며 말씀하십니다.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천국의 비밀’에서 ‘비밀’의 헬라어는 ‘뮈스테리온’으로 히브리어의 ‘소드’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는 ‘천상의 회의’에서 유래된 말이라고 합니다.
즉 ‘뮈스테리온’이란 하나님의 계획이나 뜻으로 인간 스스로는 알 수 없는 진리를 말합니다. 당시 유대인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천국의 일들이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여 그 말씀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는 이들이 나아와서 물었기에 예수님이 말씀해 주심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즉, 사랑하는 자가 궁금해하고, 궁금해하기에 질문하고, 질문하기에 사랑으로 답해주시어 알 수 있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반면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라는 말씀은 그 반대로 이해하면 아주 쉽게 이해가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에 대해서 알고 싶은 마음이 없고 궁금하지도 않다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그렇다면 그들은 묻지 않을 것이 당연하며, 묻지 않는 자는 당연히 그 답을 들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해하면 천국의 비밀을 허락해주신 특별한 사람들이 따로 정해져 있고,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은 것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잘못된 선민의식과 선택된 백성이라는 근거없는 자만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의 예수님께서 편애하셔서 누구는 선택하고 누구는 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비정한 자본주의의 논리처럼 있는 자는 더 넉넉하게 되고, 없는 자는 빼앗긴다는 말씀으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는 매우 단순하고 아름다운 섭리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첫째라는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에게 무관심할 수 없습니다.
그분과 함께 있고 싶고, 그분의 오묘한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고, 더 알고 싶고 더 깨닫고 싶은 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이 없다면 아무리 교회 생활을 오래 한다고 해도 사랑의 결실을 맺을 수 없습니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사람이나 교회 생활을 오래 한 사람일수록 더 이상 예수님에 대해 궁금한 것이 없는 듯한 모습을 발견합니다. 마치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이지요.
과연 이미 다 알아질 수 있을 만큼 예수님이 작은 분일까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말라기에서 “너희가 나를 멸시하였다”라고 말씀하시자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멸시하였나이까?”라고 되물었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살아 움직이듯 마음을 쑤셔댑니다.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그들이란 바로 우리 모두입니다. 우리의 질문이 이래야 할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멸시했냐는 당당한 태도가 아니라 아직도 나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겸손한 태도, 그래서 그 참 의미가 궁금하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의도와 성품과 뜻이 궁금하고, 그 말씀 앞에 비추어 나의 상태가 예수님 보시기에 어떤지 궁금하고, 내가 이 말씀을 붙들고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가 궁금해야 합니다.
그렇게 물을 수 있는 태도가 나를 예수님 앞에 바로 세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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