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 성경 묵상은 평신도에 의한 평신도를 위한 묵상입니다. 화석화된 동어 반복의 신학적 용어들은 때때로 우리 삶의 부조리한 고통을 위로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가 있습니다. 보다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깨달음과 설명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나눔을 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마태복음 13장 16절~17절)
“눈은 봄으로, 귀는 들음으로”라는 말씀은 단순히 보고 듣는 육체적 행위가 아닙니다. 보고 듣는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하며, 그 의미를 찾고자 탐구하는 영적 의지와 감수성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사랑, 천국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널리 객관적으로 알려지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영적 의지와 감수성에 따라 가져오는 결과는 전혀 달라집니다.
여기에서 보고 듣는 것은 11절에 나오는 천국의 비밀입니다. 그 비밀은 천국이 도래했다는 것, 즉 예수님이 오셔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속에 새 하늘과 새 땅의 천국이 임하였다는 것입니다.
16절의 말씀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이를 보고 듣기로 의지와 감성을 다해 탐구하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것이며, 17절은 구속사적 차원에서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 사람들은 이 천국 비밀을 깨닫고 싶어도 깨달을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크나큰 축복이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에는 또한 책임이 따릅니다. 쉽게 알 수 있는 길이 열렸는데도, 알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더 큰 죄라는 사실 말입니다.
17절 초반부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고 강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진 일에 대해 확증하는 것이며, 그 일을 행하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이제 말씀하고자 하시는 내용에 대해서 진정성과 진실성을 확증하여 듣는 이를 각성시키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진실로 확증하십니다. 그 선지자들과 의인들이 뭐가 부족해서 그럴까요?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뜨거운 열망과 사랑, 온 삶과 목숨을 다 바친 충절과 진리를 구하는 간절함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가슴 아프게 배워왔습니다.
이사야는 전승에 의하면 톱으로 켜서 죽음을 당하였고,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는 구덩이에 갇히고 조롱받으며 날마다 애통했고, 에스겔은 벙어리가 되었다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자기 몸의 털을 밀며 조롱을 당하였고, 호세아는 하나님의 명대로 창녀와 같은 고멜과 결혼하였으며, 다윗은 궁정에서의 한 날보다 주의 장막의 문지기가 낫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이 무엇이 부족해서 천국의 비밀을 볼 수 없었겠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믿음이 큰 자라 하여도 그들을 따라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천국 비밀을 아는 축복이 주어지지 않은 것은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 날로 인하여 구약시대와 신약시대가 나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그날을 인간의 바람이나 열망으로, 노력이나 간절함으로 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신약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가 더 우월한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특별히 우리를 더 사랑하셔서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진리가 드러나고 하나님이 인간이 되는 우주적 사건을 보게 된 지금 우리에게는 큰 축복과 함께 큰 책임이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보지 못하고도 갈망하고 믿었던 그들에 비해서 보고도 안 믿는 우리의 믿음 없음이 여실히 증명되기 때문입니다.
천국 비밀이 세상에 편만하게 드러났다는 것은 그 빛에 의해 우리의 악함이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알려졌는데도 더 마음이 냉랭해져서 딱딱해지고 복음 앞에 코웃음을 치는 이들이 많습니다.
쉽게 얻은 것은 값진 줄 모르는 악한 습관이 인간에게 생겨났습니다. 본성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본래 인간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이었으니 아름다웠으리라 믿으니까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인간의 본성이 그렇게 악하고 추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원죄 이후로 거칠고 힘든 삶을 살면서 그런 악한 습관이 생긴 것이지요. 가시엉겅퀴 속에서 땀을 내며 살아가는 동안 인간에게 생겨난 거친 습관이라 믿습니다.
이 냉랭함은 현대에 와서 더 심해진 것 같습니다. 실존주의 이후로 포스트모더니즘까지 오는 동안 수많은 예술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갈수록 더 냉랭해진다는 것입니다. 감정과 의지의 의미를 잃고 무감각하게 떠밀리듯 살아가는 인생들이 많아졌습니다.
이상향을 향한 갈망이 있었던 근대까지만 해도 인간에게는 더 나아지려는 욕구, 현실을 극복하려는 욕구,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희망 속에 기독교는 낙관적 세계관을 보여주었습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절망의 기운이 너무 강합니다. 소망없이 하루하루 살아가는 삶 속에 자신의 존재 자체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강합니다. 생각하면 우울하니까요.
하지만 더 깊이 더 치열하게 더 아프게 자꾸 더 생각해야 합니다. 나라는 존재의 희망없음, 막힌 현실에 대한 답답함, 이 삶에 던져진 나라는 존재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한 물음……
이런 물음을 치열하게 갖는 의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복음에 대한 탐구가 가능합니다. 구원이 없는 이 세상에서, 너무나도 확고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예수님이라는 존재에 대해 탐구할 영적 의지와 감수성이 거기에서 생겨납니다.
이 세대에 기독교는 과거 먹을 것이 없었던 시대의 오병이어와 같은 방식으로 작동한다기보다는 이런 철학적 물음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 같습니다.
예수님도 이미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에 표적을 보고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표적에 의한 복음 전도는 많은 사람을 한꺼번에 따르게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방식이 작동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적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기적이 아닌 다른 방식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표적이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대한 궁금증과 “그분이 누구신가?”라는 영적 질문, 그분을 알고 싶다는 탐구 의지, 그분에 대해 더 파헤치고 싶은 영적 사랑의 감수성이 필요합니다.
이미 그것을 구약시대의 선지자들과 의인들은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천국 비밀의 빛을 그들이 얼마나 찾고 탐구했는지, 그 마음의 진심을 조금이라도 상상해본다면, 조금이라도 그들의 마음에 공감되어 아픔을 느낀다면, 이제 우리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내 존재의 원천, 내 고통의 구원에 대한 확고한 답변을 주는 그분이 누구신가에 대한 궁금증, 알고자 하는 마음의 사랑!
그것이 우리의 삶에 이미 임한 천국을 맛보게 할 것입니다. 그런 갈망으로 그분을 탐구하고 그분을 알아갈 때 어느 순간 큰바위얼굴을 바라본 소년이 할아버지가 되어 그 얼굴을 닮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의 모습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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