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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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페르난두 페소아 <틈>

by 브린니 2020. 11. 20.

 

 

나의 어두운 시절에

내 안에 아무도 없을 때

삶이 얼마나 주든 갖든

모든 것이 안갯속이고 벽일 때,

 

만약 내가 내 안의 파묻힌 곳에서

한순간 이마를 들어

지고 있거나 떠 있는 태양

가득한 먼 수평선을 바라본다면,

 

나는 다시 살고, 존재하고, 알게 된다.

그리고 나를 잊게 되는 그 바깥

그것이 비록 환상이라 할지라도,

나는 아무것도 더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너에게 마음을 내준다.

 

                                                       1934. 2. 12.

 

                                                    ―페르난두 페소아(포르투칼, 1888-1935)

 

 

【산책】

 

이 시를 그냥 읽고,

되풀이해서 또 읽고, 다시 읽고, 그냥 읽고 싶다.

 

이 시에 토를 달고 싶지 않다.

시의 모든 구절들이 나의 이야기인 것처럼 느껴진다.

 

나의 어두운 시절에

내 안에 아무도 없을 때

삶이 얼마나 주든 갖든

모든 것이 안갯속이고 벽일 때,

 

어쩌면 아주 어린 시절에 나는 고통 받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젊은 시절에 젊다는 것이 그토록 힘겨웠는지도 모른다.

 

삶이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건데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몰랐기에 실수투성이의 나날들.

 

삶을 알 수 없었기에

왜 운명이라는 것이 삶을 그만둘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는지……

 

만약 내가 내 안의 파묻힌 곳에서

 

내가 한 치도 더 나아갈 수 없이 파묻힌 곳에서 그냥 잠들어버리고 싶을 만큼

내 안에 아무도 없고,

나 스스로 그저 텅 빈 거대한 구렁처럼,

깊은 심연, 파묻힌 장소,

 

한순간 이마를 들어

 

바깥을 볼 수 있게 하신 신께 감사드린다.

 

나는 다시 살고, 존재하고, 알게 된다.

 

깊은 구덩이에 갇혀 있었던 세월, 벌써 나이가 들었다.

아직 살고, 존재하고,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알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나를 잊게 되는 그 바깥

 

내 안에 아무도 없을 때

바깥에는 누군가 있었다.

 

아니, 그저 바깥이 있었다.

나의 바깥을 보면서 나를 잊었다.

 

나는 아무것도 더 원하거나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원하거나 갈망하지 않는다.

나는 나 자신으로 족하다.

 

나 말고 나의 바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그것은 내가 살 수 있는 이유이다.

 

나만을 들여다보는 시간에서 이마를 들어 바깥을 본다.

바라볼 수 있는 바깥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나는 너에게 마음을 내준다.

 

나의 바깥이여!

나의 사랑은 나의 내부가 아니라 밖이어야 한다.

 

나의 밖에 있는 사람.

사랑이여, 추운 데서 떨고 있는 바깥의 사람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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