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Boutes> ― 음악에 바친 짧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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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Boutes> ― 음악에 바친 짧은 책

by 브린니 2020. 11. 16.

세이렌의 노래에 접근하려고 물에 뛰어든 부테스 Boutes를 위한 애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 부테스는 아르고 원정대 중의 한 사람으로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이끌려 바다로 뛰어든 남자이다.

 

파스칼 키냐르 <부테스>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영웅 이아손과 함께 황금양모를 구하기 위해 콜키스로 떠난 50명의 영웅들 즉 아르고 원정대는 세이렌이 살고 있는 해협을 건너가려고 한다. 그런데 세이렌이 매혹적인 노래를 불러 선원들을 유혹하자 오르페우스는 하프를 연주하며 선원들을 막아섰다. 그런데 선원들 중 유일하게 부테스만 세이렌에게 다가가려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부테스만이 오르페우스의 구원의 음악을 뿌리치고 파멸의 음악인 세이렌의 노래에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물에 뛰어들었다.

 

 

이 책 <부테스>는 파스칼 키냐르가 음악에 바친 책이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자신도 여러 악기를 연주하고, 오르간 연주자로 잠시 활동하기도 한 키냐르가 평생 작가로 산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음악에게 헌정하는 의미로 이 책을 쓴 것이다.

 

음악에 바치는 책인데 왜 하필 부테스일까?

 

그것은 파스칼 키냐르가 음악을 예술 가운데 가장 태곳적이며 시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래 음악이란 무엇인가? 물로 뛰어드는 욕망이다.

 

키냐르는 우리가 태어난 곳은 땅이 아니라 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어머니의 양수에서 10개월을 살다가 세상으로 나왔다. 우리는 어머니의 자궁에서 오로지 어머니의 목소리만 듣고 살았다.

 

어머니는 아마 자장가를 불러 주었으리라. 이것이 우리가 들은 최초의 음악이다.

 

세이렌은 노래로 선원들을 유혹해서 그들을 파멸로 이끈다. 파멸의 끝은 죽음이다.

 

반면에 오르페우스는 선원들을 위해 하프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키타라를 연주해서 세이렌의 노래를 물리친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부테스만은 바다에 뛰어들고 만다.

왜 그는 바다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사람들은 그가 어리석게도 죽을 줄 모르고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당해서 자신도 모르게 빠져든 것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아니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자신의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물에 뛰어든 의지가 박약한 사람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키냐르는 부테스를 옹호한다.

 

부테스만이 음악을 향한 욕망을 멈추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키냐르는 부테스의 물로 뛰어드는 욕망을 파헤쳐 오르페우스의 사회적 음악이 억압하고 희생시킨 그리하여 은폐된 본래의 음악과 그 본질에 다가가기 위해서(옮긴이 해설) 이 책을 썼다고 할 수 있다.

 

키냐르는 음악이 그리스 음악에서 로마 음악으로, 그리고 기독교 음악으로, 다시 서양 음악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더 오르페우스적이고 주술적으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서양 음악은 옛날의 핵에 속하는 시원의 춤을 희생시켰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오르페우스가 희생시킨 옛날의 핵이자 시원의 춤으로서의 음악은 어떤 음악일까?

 

키냐르는 부테스와 세이렌의 노래를 통해 이를 되살려는 듯 보인다.

 

세이렌의 노래는 짐승의 노랫소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임계臨界 부재不在의 목소리 즉 분리되지 않은 불분명하고 연속된 목소리이다. 쉽게 말해 끊어지지 않고 계속되는 짐승의 울부짖음 같다는 뜻이다.

 

세이렌은 옭아매는 여자들이다. 세이렌은 묶다에서 파생된 단어다. 이런 짐승의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옭아매어서 죽음으로 이끄는 것이 세이렌의 노래이다.

 

세이렌의 노래는 어쩌면 노래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고, 음악이라고 부를 수는 더더욱 없는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그것은 노래 이전의 노래이며 음악 이전의 그저 소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세이렌의 노래는 태곳적 음악, 음악의 시원이자 본질인 것인지도 모른다.

 

음악은 마디로 분절되고 정제된다. 그러나 세이렌의 노래는 그냥 끝없이 이어지는 울부짖음이다. 그래서 분절된 언어에 앞서 존재하는 노랫소리는 애도에 잠긴 ‘길 잃은 본성’으로 다이빙한다.

 

음악은 언어보다 앞선, 시간보다 앞선, 의식보다 앞선, 태양 자체의 대기보다 앞선 내면의 시원적 수하誰何일 뿐이다.

 

* 수하(誰何) 어두워서 상대편의 정체를 식별하기 어려울 때 경계하는 자세로 상대편의 정체나 아군끼리 약속한 암호를 확인함. 또는 그런 일.

 

음악은 아직 정서의 울림에 불과할 때의 이름과 흡사하다.

 

여자의 젖가슴을 지닌 새의 오래된 목소리가 부테스를 부르는 것도 그러하다. 이름보다는 심장의 박동으로 그를 부른다. 그래서 부테스는 노 젓는 자들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말하는 자들의 사회를 떠나고, 배에서 뛰어내리고 바다에 몸을 던진다.

 

부테스는 노래를 들으려는 열망이 타올라 기운차게 헤엄친다. 여인의 얼굴과 젖가슴을 지니는 암컷 새들의 고음이 물속에서 쭉 뻗은 그의 육체를 끌어당긴다. 그는 해변에서 불쑥 튀어나온 험악한 바위로 헤엄쳐 다가간다. 바위 뒤편으로 이미 초원이 보인다. (이 초원은 세이렌의 노래에 이끌려온 수많은 뱃사공들의 뼈들로 가득하다.) 그는 이제 노래하는 섬에 막 닿으려는 참이다. 섬은 말 그대로 ‘노래하는 중인 해변, 홀리는 땅이다. 그는 바야흐로 풀밭에 그리하여 죽음의 순간에 닿으려고 한다.

 

그는 어디로 가는가? 이름들 자체보다 훨씬 더 절박한 음들이 들려오는 곳으로 간다.

 

세이렌들이 부테스의 시원적 영혼을 순전히 접근하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 채운다.

 

키냐르는 말한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춤이다.

춤이란 무엇인가? 참을 수 없이 일어서는 욕망이다.

 

춤이란 발생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이다. 태어나는 순간 죽는 것이다.

음악 역시 그렇단 말인가.

 

인생도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사실상 죽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디데이 마이너스 며칠.

D―00.

생일(탄생)이란 아마도 죽음으로부터 100년쯤 떨어진 지점이 아닐까.

 

부테스는 아르고호 선원들의 무리를 떠났다. 그리고 세이렌들의 부름에 응답했다. 부재하는 목소리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기원의 음악에 응답했다. 목소리의 호출보다 더 오래된 부름에 예측에서 빗나간 응답을 할 줄 알아야 한다.

 

키냐르는 부테스가 기원의 음악에 응답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리고 그 오래된 부름에 응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키냐르는 법과 질서의 신으로 상징되는 아폴론의 숭배자 오르페우스가 짓는 분절되고 정제된 음악의 틈 사이로 세이렌의 짐승의 울음소리 같은 음악 이전의 노래를 끼워넣는다.

 

어쩌면 음악의 예외로서의 음악, 탈구된 음악, 음악을 훼손하는 얼룩과 같은 음악을 음악에 포함시키려고 한다.

 

예외가 없는 법이란 없다는 말은 예외를 포함해야 진짜 법이 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세이렌의 노래를 빼버리면 음악이 존재할 수 없다는 될 수도 있다.

 

키냐르는 획일화된 질서가 아니라 질서를 벗어나지만 오히려 기원적인, 시원적인, 본질에 가까운 무엇인가를 추구한다. 그것이 환영에 가까운 것일지라도.

 

키냐르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부테스를 다시 물에서 끄집어 올려서 부테스가 미쳐서 달려간 세이렌의 노래마저 음악의 시원으로서 되살려 낸다.

 

이미 죽은 것들을 되살려 내서 뭘 어쩌자는 것일까.

 

이 책은 부테스에 관한 애도이다. 오직 부테스만이 음악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송두리째 던진 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키냐르는 부테스를 통해 태곳적 소리, 음악의 시원에 접근한다.

 

 

부테스가 세이렌의 노래에 이끌려 바다에 뛰어들었을 때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다. 그리고 바다 거품 속에서 사랑을 나누고, 아들 에릭스를 낳았다고 한다.

 

아프로디테는 부테스가 시원의 음악에 이끌려 물에 뛰어들어 몸과 영혼을 다 바친 것에 감복해서 그와 사랑을 나누고 아들을 낳았던 것이다.

 

이탈리아 서해안, 나폴리의 남쪽 약 80km 지점에 파에스툼(Paestume)이란 작은 도시가 있다. 그곳에는

1968년 여름 발굴된 『뛰어든 자(다이버)의 무덤』(Tomba del tuffatore)』이 있다. 무덤에는 물에 뛰어드는 남자의 그림이 벽화로 그려져 있는데 키냐르는 이 남자가 부테스를 가리킨다고 말하는 것 같다.

 

 

뛰어든 자, 부테스

 

이 벽화의 주인공이 부테스이든 다른 사람이든 ‘물에 뛰어든 자’를 기념하기 위해 무덤을 만들고 벽화를 그린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은 어머니의 양수를 상징하며 깊은 바다 속은 인간 내면의 심연을 상징하기도 한다. 부테스는 가장 태곳적 바다(양수)로 뛰어든 자이다. 물 속 깊은 곳에서는 어떤 소리가 들릴까.

 

음악은 바로 이 깊은 태고의 물소리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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