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 사랑하는, 죽은 개를 위한 진혼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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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장 그르니에 <어느 개의 죽음> ― 사랑하는, 죽은 개를 위한 진혼곡

by 브린니 2020. 11. 18.

개, 자유를 잃고 사랑을 얻다!

 

 

타운하우스 골목에서 사람들 몇이 서 있었다. 가까이 가 보니 길 한복판에 여인이 쓰러져 울고 있다. 그녀 앞에는 개 한 마리가 죽어 있다. 택배 트럭이 서 있고, 운전사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곧 경찰이 출동했다. 아마도 택배 차량이 골목에서 개를 보지 못하고 친 것 같았다.

 

개가 죽어 누워 있고, 개의 주인 여인이 무릎을 꿇은 채 울고 있다.

 

정말 세상 그렇게 슬플 수 없이 거의 통곡을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개 한 마리가 죽었다고 그렇게 슬프게 울 수 있을까.

그렇다.

 

개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개를 사랑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사랑하는 개가 죽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것 못지않게 슬프다.

울고, 울고, 또 운다.

 

 

장 그르니에의 산문 <어느 개의 죽음>은 저자가 기르던 개 타이오가 안락사한 날부터 거의 한 달 동안 쓴 개를 추모하는 글이다.

 

 

작가들은 사랑이 끝난 뒤, 혹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은 뒤 그 사랑과 그 사람을 기리기 위해 글을 쓴다.

기형도의 싯구처럼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이것이 모든 시인과 작가들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모름지기 글쓰기란 ‘지금은 없는 것’에 대한 애도이자 추모이며 진혼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르니에의 개, 타이오는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다. 의학적으로 더 이상 살 수 없는 상태였다. 죽기 며칠 전부터 병 때문에 몹시 아팠다.

 

개의 고통은 나의 감정이 버티지 못할 만큼 오랫동안 계속 되었고, 나는 모든 감정이 바닥나 버린 일종의 고갈 상태에 놓여 있었다.

 

나는 한 손으로 녀석의 고개를 받친 채 다른 손으로 주둥이를 수없이 쓰다듬어주었고

 

나는 녀석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녀석이 내가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믿을 수 있다는 생각에 나는 고통스러웠다.

 

그르니에는 개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죽음 앞에선 사람이나 동물들을 위해서 의사라도 별로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개의 입장에서는 주인이 무엇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길 수 있다.

개가 그런 눈으로 주인을 바라본다. 눈에 눈물이 고인 채.

 

대자연은 우리에게 세상에서의 첫날과 마지막 날을 선사했다.

 

그르니에는 이것을 감당할 수 없고, 모든 감정이 다 고갈되는 듯한 느낌을 느낀다.

그르니에는 개와 함께 마지막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르니에는 타이오를 주워 길렀다. 길에서 우연히 떠돌이 개들 사이에 있던 타이오가 그르니에 부부를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그들 곁에 죽을 때까지 머물렀다.

 

녀석으로 인한 불편함마저 녀석에 대한 우리의 애정을 북돋았다.

 

사람들은 대개 장례식에 모여 고인에 대해 이러저러한 말들을 한다. 그 사람 참 법 없이 살 사람이었는데, 술만 좋아하지 않았다면 좋은 사람이었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너무 좋아했지, 등등. 역시 개가 죽으면 개를 추억하며 이런 저런 말들을 할 것이다.

 

녀석은 사랑스러웠던가? 충직했던가? 한 존재가 사라지고 나면 우리는 그 존재에 온갖 장점들을 갖다붙인다. 그런 값싼 대가를 치름으로써 그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위선은 구역질이 나지만 나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의 위선자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르니에는 자유에 대해 생각한다. 자유롭게 살던 개가 사람과 함께 살면서 잃는 것이라면 바로 자유이다.

 

떠돌이 개들 무리에서 녀석을 데려옴으로써 우리는 녀석을 행복하게 한 만큼 불행하게 했다. 배가 고프면 먹을 수 있었고, 자유를 제외하고는 없는 것이 없었으므로 녀석은 어느 정도는 행복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지만 자유롭게 살아왔던 녀석에게 제한된 자유라는 것은 궁핍보다 견디기 힘든 것이었을 것이다. 녀석이 사람의 애정을 필요로 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개를 기른다는 것은 개를 길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행위인가?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에서 “사랑은 길들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짐승들은 애정에 길들여지지 않는 한 자유롭다.

 

개를 길들이면서 개에게서 자유를 빼앗는다.

이것이 가장 큰 딜레마이다.

 

떠돌이 개들은 왜 사람을 따라왔을까.

 

타이오는 자유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했다.

개들은 인간의 사랑을 필요로 했다. 자유를 버릴 만큼.

 

개가 살아 있을 때는 개들의 잃어버린 자유를 애도해야 한다.

그러나 개가 죽은 뒤에는 무엇을 애도해야 하는가.

 

개의 죽음을 애도하는 것은 개와 함께 떠나버린 인간의 애정,

개에게 쏟았던 사람의 사랑, 그러나 지금은 소멸해버린 사랑을 애도해야 하지 않을까.

 

그르니에의 개, 타이오는 자유를 잃고 사랑을 얻었다.

그리고 이제는 주인의 사랑을 몸에 지닌 채 세상을 떠났다.

 

개는 고양이와 달리 왜 그토록 인간의 사랑을 목말라 하는 것일까.

 

사람은 사람을 배신하지만 개들은 사람의 사랑을 배신하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개를 기르는 이유일 것이다.

 

개는 사람의 사랑을 온 몸으로 거의 절대적으로 느낀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배신하지 않고, 그 사랑을 보답한다.

 

절대적인 충성과 절대적인 복종과 절대적인 친밀감으로!

사랑을 받으면 어떻게 그 사랑을 돌려주어야 하는지 마치 아는 것처럼.

 

그르니에는 개의 죽음 앞에서 개의 삶을 추억한다.

삶은 죽음을 가져오고, 죽음은 삶을 포함한다.

 

녀석이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나는 녀석의 삶을 정리해 보고 싶은 욕구를 억제할 수 없다.

 

그르니에는 타이오와의 추억을 정리하면서 진혼곡을 완성한다.

죽은 개에 대하여 글을 쓰는 것은 개를 잃은 공허감을 견디는 그르니에의 방식이다.

 

조용하면서, 나긋나긋하면서, 부드럽고, 설득력 있는 문체로 자신의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전하는

철학자 장 그르느에의 산문은 어느 주제나 인간의 삶을 깊이 있게 성찰한다.

개의 죽음 역시 인간이 겪는 일 가운데 하나니까 말이다.

 

 

어느 날 타운하우스에서 보았던 개의 죽음 앞에서 울던 여인,

그 여인은 개를 어떻게 추억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개의 죽음을 견디고 있을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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