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단풍나무길 산책 ―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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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일상생활

가을, 단풍나무길 산책 ―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

by 브린니 2020. 11. 8.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독립기념관로 1

 

 

언제 한 번 단풍구경 하러 가자 생각만 하고, 말만 하다가 결국 단풍이 지고 마는 경우가 여러 해 있었습니다. 이번 해에도 그럴 수도 있겠다, 이러다 말겠구나 이런 생각이 많았습니다.

 

근교에서 본 은행나무의 기억도 있고,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단풍나무도 예뻐서 그냥 그대로 넘어갈까 하는 마음도 있고, 코로나로 어디를 가기도, 사람들 많이 모이는 곳에 가는 것이 왠지 걱정도 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서 몇 날 며칠 머뭇거리고만 있었습니다.

 

가을에도 꽃을 볼 수 있지만 봄이 꽃의 계절이라면 가을은 나무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나무들이 초록잎들을 노랗거나, 붉거나 주황빛으로 물들이는 모습은 거리에서, 들과 산에서 흔히 볼 수 있고, 또 너무나 아름다우니까요.

 

 

단풍을 보러 잠깐 길을 나섰습니다. 차에서는 길병민의 꽃 때가 흘러나옵니다. 낮은 베이스 음색이 곡과 정말 잘 어울립니다. 꽃 때라면 흔히 봄을 떠올리는데 이 노래는 가을에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앨범도 가을에 발매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노래의 가사는 정말 아름답고, 슬프죠. 길병민의 목소리는 담담하게 그러나 애절하게, 동시에 간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표현합니다. 처음 들을 땐 눈물이 나다가 자꾸 들으면 깊이 우울에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이병률 시인이 쓴 시, 꽃 때의 가사는 이렇습니다.

 

 

꽃 때

 

저 달이 기울면

한 사람이 가네

아직 전하지 못한 맘

눈 감으면 아파오네

 

꽃 피기도 전에

내 한 사람이 가네

언제 꽃 피면 꽃 보자던 그때

난 기다리네

꽃 때

 

부를 수도 닿을 수도

잡을 수도 없는 사람이여

때 아닌 봄날의 눈보라에

이 아픔이 마지막이 아니기를

처음 사랑이길

 

내 가슴을 잘라

이 눈물로 묻고

조금 쓸쓸히 꽃물이 들어도

나 괜찮겠네

 

나 햇살이 되어

저 달을 보내고

꽃잎 시들어 쌓이는 이때를

나 견디겠네

꽃 때

 

―이병률

 

 

한 사람이 가고, 나는 마음이 아프지만 같이 꽃을 보러가자던 말을 믿고 그때를 기다립니다. 하지만 때 아닌 봄날의 눈보라에 꽃을 보자던 약속은 무너지고, 이제는 아픈 가슴과 눈물로 꽃물이 들어도 괜찮다며 꽃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꽃잎 시들어 쌓이는 이때를 견딥니다.

 

www.youtube.com/watch?v=_ytCtyeiBdI

 

이 시처럼 가을은 사랑 때문에 아파하고, 잃은 사랑 때문에 슬퍼하는, 그래서 성숙하는 사랑의 계절인 것 같습니다.

 

가을 단풍을 보면 붉게 타오르는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떨어지는 낙엽은 실연의 아픔을 보는 듯합니다.

 

 

창밖으로 가을걷이를 끝낸 들판이 봄의 연두, 여름의 초록, 가을의 누런 풍요를 다 걷어내고 마치 몸의 내부를 드러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억새풀만 빈 들판을 수놓고 있습니다.

 

아, 잎이 하나도 없는 가을나무에 새가 집을 지었네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앙상하지만 단단해 보이는 나무 가지 사이에 새는 집을 짓고 새끼들을 기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말라버린 듯한 계절이지만 생명이 자라고 있습니다.

 

차는 독립기념관 앞으로 우리를 데려다놓았습니다. 전시를 보러 온 것은 아니고, 단풍나무숲 길을 산책하러 왔습니다. 독립기념관 입구에서부터 단풍은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낙엽은 인도를 가득 덮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단풍나무숲 길이 나옵니다. 여기서부터 단풍을 실컷 구경할 수 있습니다.

 

 

 

 

독립기념관 단풍나무 숲길은 좌우로 빽빽하게 심긴 단풍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습니다. 주말을 맞아 많은 사람들이 단풍을 즐기려고 나왔습니다. 연인들, 가족과 친구들과 어울려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독립기념관에 와서 단풍을 보고 있으니까 떠오르는 시가 있습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指針)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에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한용운, 「님의 침묵」

 

십대 시절 외우고 다니면서 읊어댔던 기억이 납니다. 잃어버린 님(나라)을 결코 보내지 않겠다는 절절한 마음을 노래한 시죠.

 

사랑하는 님은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길어서 갔지만 나는 님을 보내지 않습니다.   내가 부르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단풍나무 숲길을 걸으며 님의 침묵을 읊자니 단풍을 노래한 또 다른 시가 떠오릅니다.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이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 김영랑, 「오메, 단풍 들것네」

 

 

영랑의 시를 외우고 있으니까 마음이 한결 밝아지는 느낌입니다. 단풍을 즐기는 마음이 좀더 업되는 듯 합니다. 단풍구경은 단풍놀이!니까요.

 

 

그런데 왜 가을이 되면 나무들이 단풍에 물드는 것일까요?

 

광합성을 하는 식물들은 빛이 없는 밤에 사람과 같은 호흡을 하여 당을 소비하는데 기온이 낮으면 호흡량이 줄어들어서 엽록소의 광합성으로 만든 당을 소비할 수 없게 됩니다. 그래서 당이 줄기로 내려가지 못하고 잎 끝에서부터 조금씩 쌓이게 되고 엽록소 생산을 중단하기 때문에 단풍이 물들게 됩니다.

 

잎이 붉은 색으로 변하는 단풍은 엽록소가 사라지는 대신 잎 안에서 안토시아닌을 형성하기 때문에 붉은색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노란 단풍은 카로티노이드 색소 때문에 노란색만 남는 것입니다.

 

일교차가 클 때 단풍이 예쁘게 물드는데 이때 당이 많이 생성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당이 많을수록 안토시아닌, 카로티노이드계 색소는 화학적으로 더 활발해져서 단풍색이 훨씬 더 밝고 선명하게 변하게 됩니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오랫동안 단풍을 구경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단풍은 곧 낙엽이 되어 떨어집니다. 단풍을 즐길 수 시간이 짧아 너무 아쉽죠.

 

 

낙엽이 떨어지는 이유는 활엽수들은 추위에 약하고, 겨울에는 땅이 얼어 수액이 잎에 공급하기 힘들어지는데 단풍을 낙엽으로 떨어뜨려 흙을 조금 더 윤택하게 만들고, 겨우내 흙이 얼지 않게 만들어 뿌리를 보호하기 위함이라 합니다.

 

단풍나무丹楓 Palmate maple는 전 세계에 128종이 있는데, 아시아와 유럽에 많이 서식하고, 북아프리카와 메이플시럽으로 유명한 캐나다와 북아메리카에도 여러 종이 분포합니다. 우리나라에는 단풍나무, 신나무, 당단풍, 고로쇠나무, 복자기 등의 단풍나무가 산지에서 자랍니다.

 

4월과 5월에 꽃은 수꽃과 양성화가 한 그루에 핍니다. 잎은 마주나고 손바닥 모양으로 5∼7개로 깊게 갈라지는데 잎자루는 붉은 색을 띠고 길이가 3∼5cm입니다. 열매는 시과로 길이 1cm정도로, 털이 없으며 날개는 긴 타원형으로 10월 중순과 말에 성숙합니다.

 

단풍나무는 재질이 매우 골라서 목재로도 잘 쓰입니다. 야구선수들도 단풍나무 배트를 선호한다고 합니다. 가마, 소반 그리고 피아노의 액션 부분 테니스 라켓, 볼링 핀이나 체육관 바닥재로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한 단풍나무는 소리를 잘 전달하는 특성이 있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기타, 드럼 등 다양한 악기 제작에 사용됩니다.

 

 

왜 우리는 봄에는 꽃구경, 가을에는 단풍구경에 열을 올릴까요? 단지 식물들에게서 피톤치트가 나오기 때문일까요? 꽃을 보거나 단풍을 보면서 마음이 힐링되는 것은 왜 그럴까요?

 

어쩌면 우리가 세상 만물과 소통하고 대화하는 법을 잃어버려서, 자연과 말하고, 서로 위로하는 법을 잃어버려서는 아닐까요? 평소는 전혀 대화하고, 소통하지 못하다가 문득 봄이 오면, 벌써 가을이 오면, 이 시간이 지나가는 것이 안타까워서 자연과 교감하지 못하고, 단지 바쁜 일상 핑계를 대며 나 혼자만 속으로 숨기고 있던 마음의 소리를 꽃을 만나서 단풍나무 앞에서 내던지려는 것이 아닐까요?

 

그래서 봄동산에 다녀오면, 가을숲에 들어갔다 나오면, 마음이 한결 편해지는 것이 아닐까요?

 

사랑의 노래가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침묵을 누군가, 어느 대상에게로, 노래로 불러 보내고 싶은 것이 아닐까요?

 

꽃과 나무들은 우리의 침묵을 다 받아주고 그것을 다시 사랑의 노래로 우리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닐까요?

 

 

그럼 이제 우리가 무언가 자연에게 돌려줄 차례가 아닐까요? 침묵이 아닌 사랑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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