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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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향수>

by 브린니 2020. 10. 12.

<향수>만큼 독특하고 매력이 있으며 유명하면서도 적절한 리뷰가 없는 책도 드뭅니다. 무어라 말할 없는 인상이 있으면서도 도무지 무엇을 표현하려고 것인가에 대해 꼬집어 말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작가 자신이 은둔자로 유명하고 결벽증이 있어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 하며 문학상도 거부하고 작품에 대한 어떠한 이야기도 하지 않으니 독자로서는 난감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작품을 이해해 보고 싶은 갈증이 생기기도 합니다.

 

우선 작품은 1738 7 17일에 프랑스에서 주인공 바티스트 그루누이가 태어났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1738 프랑스라면 루이 14세의 뒤를 이어받은 루이 15세가 통치하던 시절입니다. 루이 14세는 절대왕정기를 누리며 끊임없이 전쟁을 하였고, 국가 재정이 바닥날 만큼 호화로운 삶을 살았으며,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이던 시절이었습니다.

 

짐이 국가다라는 루이 14세의 말로 표현되는 절대왕정기는 왕권신수설에 의하여 왕에게 모든 권력이 주어져 있었으며,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단계였습니다. 중심의 중세는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무너져갔으며 신에게 모든 것을 기대어 살았던 삶에 회의를 느낀 인간 군상들은 이제 권력을 인간 중의 최고 자리에 있는 왕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적인 권력을 받은 왕은 독재와 향략과 욕망으로 전쟁을 일삼고 백성은 이용당하기만 했습니다. 급기야 신에게도 왕에게도 실망한 대중은 스스로 일어서 인간 모두에게 권리와 권력을 나누어 갖도록 것이 근대 혁명입니다.

 

<향수>라는 작품은 절대왕정기를 지나는 동안에 태어난 어떤 "사람냄새 없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어두운 시대적 배경 속에서 그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악취와 버려짐 속에 방치됩니다. 그루누이의 어머니는 시장에서 생선을 파는 여인인데, 이미 아이를 생선 더미 속에서 낳았으나 죽어서 태어났거나 태어난지 얼마 되어 죽어버렸습니다.

 

여인은 다섯 번째 아이 역시 그럴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태어난 탯줄을 자른 그냥 생선 내장과 대가리 속에 갓난아이를 던져버립니다. 그러나 아기를 발견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루누이는 생선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올려지고 여인은 영아살해범으로 사형을 당합니다.

 

그루누이는 교회 신부의 보호 아래 유모에게 맡겨지지만 유모는 아기에게는 아무런 냄새가 없다는 사실에 소름끼쳐 합니다. 게다가 아기라면 칭얼대고 뭔가를 요구하는 당연한데 아이는 너무 잠잠합니다.

 

또한 아기는 유달리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사람의 냄새를 맡습니다. 아기 앞에 인간은 아무도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이 냄새로 폭로되는 듯한 불안감을 갖습니다. 유모도 신부도 아기를 너무 싫어합니다. 아기의 특별함이 악마적으로 느껴집니다.

 

냄새가 없는 사람, 그런데 냄새를 너무 맡는 사람…… 작가 쥐스킨트가 설정한 특별한 존재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시기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저분한 환경 속에서 악취를 풍겼다고 합니다. 그루누이의 엄마가 취한 추악한 행위들이 악취를 증명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사랑인 자기 아기에 대한 사랑조차 일말의 조각도 남아 있지 않은 인간성 말살의 시대,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악취를 풍겨야 합니다.

 

그런데 그루누이는 악취가 없습니다. 물론 좋은 향기도 없습니다. 그래서 존재는 백지의 상태입니다. 백지의 상태란 무엇이든 그릴 있는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연히 아무런 냄새가 없기 때문에 냄새를 맡을 있는 것입니다. 냄새를 맡는 그의 특별한 능력은 그가 시대적 특징 속에서 어떠한 물도 들지 않은 순수한 상태로 태어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순수한 상태는 악취가 가득한 인간에게는 두렵고 낯설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흔히 두려움과 낯섬은 추악한 상태에 있는 사람에게는 악마적으로 느껴지게 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자기 자신을 투영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두렵고 낯선 것에서 소망과 기대를 가질 있다면 사랑이 가득한 상태의 사람일 것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투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루누이가 악마로 취급된 것은 그가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는 다른 순수성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에 대해서 쥐스킨트는 쓰고 싶었을 것입니다.

 

악취가 가득한 사람들은 너도나도 향수를 찾습니다. 당시 가장 유행하던 향수는사랑과 영혼이라는 이름을 가진 향수입니다. 중세적 신에 대한 실망으로 신의 권위를 인간 왕에게 양도한 사람들이 여전히 찾는 것은사랑과 영혼입니다. 그들이 갈망하는 가장 좋은 이상적인 향은 여전히사랑과 영혼 것입니다.

 

그들은 향수를 사서 몸에 뿌림으로써 자신들의 악취를 가립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떠한 상태에 있든지 추구하는 것은사랑과 영혼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본래적 인간의 모습이며 그것은 우리 안에서 사랑이 가득하고 영혼 영혼으로 진실하게 만나는 것임을 깨달을 있습니다.

 

그것을 땅에서, 인간관계에서 찾을 없을 세상은 악취가 가득하고 결국 인위적으로 만든 향수로 대치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향수 제조업자 발디니는 한창 인기가 있는 향수사랑과 영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되지 않아 고심하고 있는데 마침 그루누이가 발디니를 만나게 되어 향수를 만들어냅니다. 냄새에 민감한 그루누이에게 향수를 만드는 일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그루누이는 발디니의 조수가 되어 일을 합니다. 발디니는 그루누이를 이용해 많은 돈을 버는데 그루누이에게 적절한 보상을 주지 않습니다. 어느 그루누이는 발디니가 축적한 많은 것들을 가지고 집을 빠져나옵니다. 그날 발디니의 집이 무너져 발디니 부부는 사망합니다.

 

작가 쥐스킨트는 그루누이가 짓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그루누이가 악마적이라고 느끼고 있는 독자들은 아마도 그루누이가 무언가를 해서 부부를 죽게 만들었을 거라고 추측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쥐스킨트는 시대 사람들이 그루누이를 악마라고 부르듯이 독자 역시 같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도리어 고발하는지도 모르지요.

 

그루누이는 인간의 냄새를 끔찍하게 여겨서 악취를 피해 도망갑니다. 산으로 산으로 높이 올라가다가 7년간 동굴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인간의 지독한 악취가 없는 깨끗한 공기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마치 무덤과 같은 동굴 속에 드러누워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웠던 과거의 나쁜 냄새를 물리치고 자신만의 왕국에서 향기가 넘치기를 소원합니다.

 

일종의 환상과도 같은 시간이 흘러갑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자신이 냄새가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순간 그루누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공포를 느끼게 됩니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 아무런 존재감도 정체성도 없는 () 가까운 상태라는 것을 순간 심각한 문제의식을 느낍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냄새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골몰합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맡았고 싫어했고 도망쳐 나왔던 악취나는 인간의 냄새가 아니라 참다운 인간의 냄새가 무엇인지 찾기 시작합니다. 그는 인간의 냄새를 만들고 싶어합니다.

 

추구는 필연적으로 비극을 예고합니다. 왜냐하면 아까도 살펴보았듯이 아무리 악취가 나는 인간도 추구하는 향기는사랑과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그루누이 역시 가장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성의 향기를 추구합니다. 그것은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만들 없는 것이기에 비인간적인 방법을 써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래서는 된다는 윤리성이 그루누이에게는 없습니다. 그는 한번도 윤리에 대해 배운 적이 없습니다. 태어나는 순간 생선 대가리와 내장 더미에 버려진 그에게는 윤리라는 것이 흔적조차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주 고전적인 아름다운 향기가 등장합니다. 이제 소녀에서 여인으로 변해가는 소녀들의 몸에서 나는 향기, 가장 순결하고 순수하며 꿈으로 가득하고 더렵혀지지 않은 향기가 바로 그루누이가 추구하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입니다.

 

서양문학에서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여성상에 대한 매우 전통적인 모티브가 등장합니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어머니 동정녀 마리아가 그러하며, 단테의 <신곡> 등장하여 천국으로 이끄는 베아트리체가 그러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를 타락의 나락에서 구원하는 매개가 되어주는 베아트리체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루누이의 특별한 점은 여성의 인도를 따라 타락과 고통에서 벗어나 구원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죽여서 향기를 빼앗는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쥐스킨트의 작가적 천재성입니다.

 

쥐스킨트는 2 세계대전 직후에 독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저널리스트로 활동하였기에 사회적인 이슈에 대해서 매우 민감한 가정 분위기였을 것을 짐작할 있습니다.

 

차례 전쟁에서 패전국이 독일의 황폐함, 게다가 히틀러에 의한 비인간적인 살상의 후유증, 일종의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리도 잔인한 짓을 죄책감 없이 저지른 수많은 독일인들의 전후의 자기분열!

 

속에서 쥐스킨트는 어쩔 몰라 직면하지 못하고 도망다니는 수많은 어른들의 고통을 보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의 또다른 대표작품 <좀머 이야기>에서 소년이 무언가에 쫓겨다니는 어른의 모습을 바라보듯이 말이지요.

 

독재와 폭력과 말도 안되는 마법 같은 추앙, 그리고 뒤에 따라온 정신분열과 같은 고통…… 모습을 <향수>에서 그대로 발견합니다.

 

쥐스킨트가 설정한 프랑스 절대왕정기의 시대적 배경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왕이 국가라는 명제 아래 스스로 전쟁 무기가 되어 죽고 죽이는 참혹한 일을 의무로 수행하는 인간들의 모습도 역시 같은 기제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1차세계대전의 패배로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때마침 불어닥친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궁지에 몰린 독일이 새로운 번영을 꿈꾸자는 히틀러의 마약 같은 말에 광신도처럼 폭력을 자행했듯이, 절대군주의 번영을 향한 꿈에 참혹한 일을 저지르고 감당해야 했듯이, 그루누이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의 향기를 만들겠다는 꿈을 이루기 위해 기꺼이 살인을 저지릅니다.

 

향수를 완성하기 위하여 마지막 25번째 소녀를 살해할 그루누이는 자신을 칭찬합니다. 어려운 과정을 완수한 자신을 향하여고맙다. 바티스트 그루누이. 지금의 모습이 자랑스럽다라고 스스로 북돋웁니다.

 

그에게 작업은 살인이 아닙니다. 그에게 작업은 최고의 꿈을 향한 진지하고 필수적이며 매우 공들여 완수해야할 사명입니다.

 

우리는 2차세계대전 전범들의 재판을 통해서 그들이 매우 정상적인 인간임에도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일들에 대해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으며 단지 일은 그들이 매우 효율적으로 수행해야 행정적 업무였음을 똑똑히 보았습니다.

 

마침내 향수를 만들기에 성공한 그루누이는 소녀들의 살해범으로 지목되어 사형을 받게 됩니다. 사형장에 호기심으로 나온 많은 사람들 속에 마지막 피해 소녀의 아버지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서 그루누이는 자신이 만든 향수를 뿌립니다. 향기를 맡는 순간 사람들은 그를 천사처럼 보게 됩니다. 그는 구세주의 현신으로 보입니다. 계몽주의자에게는 가장 이성적인 존재로 보이고, 처녀에게는 왕자님으로 보입니다. 인간 누구나의 마음 속에 품고 있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로 보이는 것입니다.

 

인간이 꿈꾸는 가장 아름다운 인간, 최고의 인간, 이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향수를 그루누이가 만들어낸 것입니다. 마침내 그루누이는 사랑받는 성공합니다. 그곳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그루누이를 사랑하게 됩니다.

 

25번째 죽임을 당한 소녀의 아버지조차 그토록 증오한 그루누이를 껴안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이 미워한 것을 용서해 달라고 하며 자신의 아들로 삼겠다고 합니다. 엄청난 일을 향수가 해냅니다.

 

우리는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살해범 청년을 아들로 삼아 목사로 키워낸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는 신앙의 힘으로 일을 함으로써 후대에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을 그루누이는 향수로 해냅니다. 그것도 25명의 살인을 통해서 얻어낸 향수, 몽환과 환영의 거짓 용서를 자아내는 향수입니다. 폭력과 거짓으로 얻어낸 가짜 성스러움, 가짜 이상향입니다.

 

쥐스킨트는 전체주의가 보여주는 이상향이 바로 이런 방식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절대왕정이나 히틀러에 의한 독재체제가 앞에 이상으로 내세운 유토피아는 사실 폭력과 살인, 거짓으로 얻어낸 환영과 같다는 것입니다.

 

환영 속에서 그토록 받고 싶었던 사랑을 받았지만 그루누이는 행복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결국 가짜라는 것을 본인이 알기 때문입니다.

 

향기가 가짜라는 것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행태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때아닌 이상향에 행복감과 사랑이 넘쳐난 나머지 아무나와 사랑의 행위를 합니다. 사이비 종교 집단이나 밀교 등에서 보여지는 이런 집단 행위는 마약과 같은 가짜 종교 행위에 의한 것입니다.

 

향수의 향기가 사라질 즈음이 되자 이들은 갑자기 문득 정신이 들어 자신들의 비도덕적 행위에 대해서 놀라며 입밖에 내길 꺼려합니다. 집단적으로 모두 기억을 지우기 위해 애를 씁니다. 모두가 함께 죄를 지어 치욕이라 여기지만 아무도 말을 꺼내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그루누이가 아닌 다른 엉뚱한 사람을 죄인으로 몰아 처형함으로써 모든 사건을 덮으려 합니다. 잘못한 일에 대한 죄책감을 덜기 위해 다른 죄를 지음으로써 악행을 더하는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루누이는 모든 허망함 속에서 이상 살아갈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냄새 없는 인간, 처음부터 ()였고, 정체성을 찾으려 해보았으나 결국 허망해져버린 그는 사라져갑니다.

 

사라지는 방식 또한 냉혹하리만큼 소설의 내용에 철저하게 부합합니다. 자기가 태어났던 , 추악한 생선더미가 있던 시장 한복판을 걸어갑니다. 시장 좌판의 채소와 고기와 생선이 시들고 썩어들어가는 악취가 가득한 그곳을 지나 시체들을 처리하는 납골당으로 갑니다.

 

밤이 되자 그곳에는 도둑, 살인자, 무법자, 창녀, 탈영병 천민들이 모여듭니다. 거기에서 그루누이는 향수를 자기 몸에 전부 뿌립니다. 갑자기 아름다움이 불길처럼 퍼져나가고 그들은 외경심과 놀라움과 갈망이 폭발하여 그루누이를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은 그루누이를 갈기갈기 찢어 가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조각난 육체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먹어버립니다. 그들은 문득 식인행동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지만 그것이 사랑 때문이었다는 생각에 당당해집니다. 그들은 처음으로 사랑에서 비롯된 행동을 했다며 행복해 합니다.

 

이해할 없는 행동에 대해서 그루누이의 마지막 생각을 떠올려봅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향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반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것이 바로 <>라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자신들이 진짜로 원했던 것이 무엇인지 그들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그루누이는 냄새가 나지 않는 사람, 어떠한 인간성에도 물들지 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진짜 원하는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질 있는 가장 아름다운 향기, 최고의 인간성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는 방법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는 추악한 살인마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향기를 맡은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이 향기였다는 것을 모르고, 향기를 지닌 사람을 추앙한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의 이상향 향기를 지녔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신처럼 추앙합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절대왕권을 가진 권력자나 독재자가 탄생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은 결국 그들 자신마저 살인마 식인종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그것이 사랑과 열정에 의한 행동이었다고 믿습니다. 마치 히틀러가 처진 독일인들을 깨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불태우며 그들의 열망과 열정에 의한 행동을 하도록 일깨운 것처럼 말이지요.

 

그것은 교황에 의한 십자군 전쟁도 마찬가지이며, 공산당에 의한 공산주의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뜨거운 열정과 사랑에 의하여 지구 전체가 들썩인 적이 여러 번이지요.

 

그렇다면 다시 되돌아가봅니다. 사람들이 원했던 향기, 그루누이가 추구했던 향기,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사랑과 영혼향수로 제조해서라도 그들이 뿌리고 싶어했던 향기, 서로 맡고 싶어했고 풍기고 싶어했던 향기는 가장 순수하고 순결하며 거짓이 없고 위악이 없으며 진실되고 철없고 순전한 향기! 가장 아름다운 인간성의 향기였음을 기억해 봅니다.

 

일말의 인간적인 사랑도 없이 생선더미에 버려진 갓난아기 그루누이의 처절한 추구가 한낱 살인마의 기행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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