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루이스 글릭 <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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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루이스 글릭 <애도>

by 브린니 2020. 10. 10.

애도

 

 

당신이 갑자기 죽은 후,

그동안 전혀 의견 일치가 되지 않던 친구들이

당신의 사람됨에 대해 동의한다

실내에 모인 가수들이 예행연습을 하듯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당신은 공정하고 친절했으며,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박자나 화음은 맞지 않지만, 그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흘리는 눈물은 진실하다

 

다행히 당신은 죽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공포에 사로잡힐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이 지나고

조문객들이 눈물을 닦으며 줄지어 나가기 시작하면;

왜냐하면 그런 날에는

전통의식에 갇혀 있다가 밖으로 나오면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살아 있는 당신의 친구들은 서로 포옹하며

길에 서서 잠시 얘기를 주고받는다

해는 뉘엿뉘엿 지고 저녁 산들바람이

여인들의 스카프를 헝클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운 좋은 삶’의 의미이므로,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므로

 

―루이스 글릭 Louise Gluck (미국, 1943― ) 2020년 노벨문학상

 

루이스 글릭 캐리커처

 

애도는 어쩔 수 없는 배신하는 행위이다.

 

애도는 죽은 사람을 미치도록 그리워하면서

죽을 것처럼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잊는 것이다.

그러나 잊는 것이다.

 

까마득히 잊는 것이다.

차마 잊을 수 없어서...... 결국 잊는 것이다.

 

슬픔이 지나치면 우울이 깊어지고 또다른 죽음이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산자들은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다.

죽은 자들은 편히 주무시라!

 

이토록 아픈 배신행위다.

 

죽은 자 ― 운 좋은 삶을 살았다.

산자 ― 운 좋게 살고 있다.

 

죽은 자는 말없이 죽음을 살고,

산자는 시끌벅적 요란하게 죽음을 모른 체하며 살고 있다.

 

죽음은 도처에 있지만

죽음은 어디에도 없다.

 

죽음은 없지만 항상 우리와 함께 살고 있다.

죽음을 살다!

 

태어나면서부터 인간은 죽어가고 있다.

과연 삶으로부터 죽음으로 이동하고 있다.

 

끊임없이!

 

 

장례식장에 모인 사람들은 죽은 사람의 생애를 판단하고 정리한다.

죽은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말을 많이 한다.

 

말을 쏟아냄으로써 죽은 자를 자신의 마음으로 떠나보내기 위해서.

 

죽은 사람의 생애는 산 자들의 입술에 의해 판단 내려진다.

그 사람은 좋은 사람이었어. 혹은 죽일 놈이었다고.

 

조문객들로부터 찬사를 많이 들어서 저 너머로 가는 길이 한결 가벼워진

당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9월의 늦은 오후인데도

햇빛이 놀랍도록 눈부시기 때문에,

사람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하는 그때

당신은 갑자기

고통스러울 만큼 격렬한 질투를 느낄 것이다

 

죽은 자는 산자를 질투한다.

죽음은 살아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다는 것보다 더한 것은 없다는 것을

그것 이상, 그 너머는 없다는 것을

죽은 자들도 동의하고 있다.

 

죽음은 늘 삶을 질투하기에

아니 죽음은 삶을 너무나 사랑하기에

자기 자신을 선물로 준다.

 

삶은 죽음을 선물로 받은 축복을 늘 지닌 채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지워나간다.

죽음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하여!

 

어느 날 선물이 폭발하면서 삶이 끝난다.

 

또 다시 조문객들이 모여서 죽은 자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죽음을 선물로 받은 아주 운 좋은 삶을 살았다고.

 

산자들로 구성된 조문객들은

9월 저녁의 산들바람에 코스모스처럼 흔들린다.

 

그리고 가을 햇살을 만끽한다.

 

‘운 좋은 삶’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

 

생을 만끽한다.

죽음은 곧...... 잊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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