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기형도 <빈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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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기형도 <빈 집>

by 브린니 2020. 10. 5.

빈집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기형도

 

 

【산책】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시를 정의하는 한 줄이다.

 

시란 사랑에 빠져 있을 때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잃었을 때, 슬픔에 젖어 있을 때,

그래서 고독할 때 쓴다.

 

 

시인은 사랑을 잃고 돌아와 시를 쓴다.

 

시인은 지금까지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이별하면서 인사를 나눈다.

 

어쩌면 사랑 때문에 밤을 새웠을지도 모를, 그러나 그 시간이 오히려 짧았던 밤에게,

 

시를 쓸 때면 창가에 떠돌던 겨울안개에게,

 

방 안 한 귀퉁이를 밝히면서 춤추던 촛불과,

 

시를 쓰기 위해 펼친 흰 종이들―가끔은 시를 쓴다는 것이 공포였을지도 모를,

 

사랑의 고백이든 혹은 어떤 결심이든 망설이기만 하던, 망설이는 동안 흘러내리는 눈물들,

 

그리고 꿈꾸고 열망했으나 이루지 못한 꿈 혹은 열망에게.

 

시인은 마치 눈을 먼 것처럼 더듬더듬 문고리를 찾아 문을 잠근다.

 

시인의 사랑을 더 이상 밖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빈 집을 갇혀 맴돈다.

 

 

사랑은 사람을 들뜨게 하고, 흥분해서 뛰어다니게 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게 만든다.

 

그러나 사랑을 잃었을 때는 침울하게 방구석에 처박히고 만다.

 

자꾸만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내가 죽어서 나를 버린 사람에게 복수하고 싶기도 하다.

 

어쩌면 모든 것에 이별을 고하고 마지막 유서와 같은 시를 쓰고 세상을 떠나려고 할 수도 있다.

 

기억나는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쓰고,

 

내가 아끼던 물건들도 챙겨서 한쪽에 두기도 한다.

 

사랑을 잃는 것은 모든 것을 잃는 것과 같다.

 

생의 의미를 잃은 듯 더 이상 살만한 이유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사랑은 죽음과 가까워진다.

 

사랑을 잃는 것,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몸보다 마음이 더 아플 때 영혼은 죽음으로 기울고 만다.

 

짧았던 밤들에게 안녕을 고하던 시인은 자신의 짧은 생을 예감했을까.

 

<빈 집>이란 시는 시인이 떠난 뒤 더 강렬하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가 어느 빈 집에 웅크리고 앉아 아직도 울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음이 진하게 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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