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고바야시 잇사 <보릿가을아……> 외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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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고바야시 잇사 <보릿가을아……> 외 15편

by 브린니 2020. 10. 3.

 

고바야시 잇사 하이쿠 16편 읽기

 

* 고바야시 잇사 小林一茶 Kobayashi Issa (일본, 1763-1828)

본명 : 바야시미타로(小林弥太郎), 배호(俳号) : 잇사(一茶)

 

*하이쿠 [haiku, 俳句(배구)]

하이쿠는 일본의 정형시로 대개 5·7·5음절로 이루어져 있다. 매우 짧은 시구詩句 속에 자연의 미美를 담은 시들이 많다.

짧은 시구처럼 찰나의 아름다움을 주로 표현한다.

 

 

 

보릿가을아

아이를 업은 채로

정어리 파네

 

우리나라에도 보릿고개라는 말이 있다. 지난가을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은 5~6월농가의 식량사정이 매우 어려운 시기로 춘궁기(), 또는 맥령기()라고도 한다. 아이를 업은 젊은 여인이 먼 바다에서 아이를 업고 도시로 와 생선을 파는 모습을 그렸다. 생활고를 겪는 서민들의 일상을 통절하게 읊었다.

 

 

눈 흩날리네

농담도 하지 않는

시나노(信濃) 하늘

 

잇사의 경험이 묻어나는 시다. 어느 3월날 아는 소년이 죽고, 6월엔 잇사의 한살배기 장녀가 죽었고, 7월엔 잇사가 학질에 걸렸다. 이런 잇단 재난으로 하늘도 무심하다고 느꼈으리라. 누구에게도 농담 한 마디 건넬 수 없는 시인의 마음을 오히려 하늘이 농담조차 할 수 없다고 표현했다.   

 

 

지는 참억새

싸늘해지는 것이

눈에 보이네

 

억새가 지면 겨울이 시작된다. 환갑을 맞은 잇사의 소회가 곁들여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계절의 변화를 자신의 나이듦과 잘 버무린 시라고 할 수 있다.

 

 

무를 뽑아서

무로 내 갈 길을

가르쳐 주었네

 

길을 묻는 나그네에게 농부는 무를 뽑던  손으로 무를 뽑아들고 그 무로 방향을 가리키며 길을 알려준다. 농부의 우직함을 유머러스하게 표현했다.

 

 

파란 하늘에

손가락으로 글자를 쓰는

가을의 저녁

 

김광석의 <동물원> 부른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라는 노래가 생각나는 시다.

잊혀져 간 꿈들을 다시 만나고파 흐린 가을 하늘에 편지를 써

시인은 누구에게 무슨 말을 전하려고 했을까.

 

 

맑은 아침에

탁탁 소리를 내는

숯의 기분아

 

자연 사물을 인간에 비유하는 의인법과 활유법을 적절하게 활용한 시다. 겨울 아침 화로의 숯을 뒤집을 때 나는 탁탁탁 소리에 시인의 기분을 빗대어 노래하고 있다. 청명한 겨울 아침에 탁탁 소리를 내며 튀는 숯의 불꽃과 자신의 마음 상태를 유쾌하게 표현하고 있다.

 

 

아름다워라

종다리가 울음 울던

하늘의 흔적

 

아름답다고 하는 시인의 미학적 판단이 '종다리의 울음'이라는 청각 언어와 '하늘의 흔적'이라는 시각 언어를 만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면서 공감각적 울림을 전해준다.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버렸네

 

벚꽃은 빨리 피었다가 빨리 지는 속성을 지녔다. 오늘 하루도 저녁이 되고, 밤에 어둠이 몰려오면 종말을 고한다. 시인도 나이가 들고,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저녁이 되어 환하게 피었던 벚꽃이 숨죽인 듯한 느낌을 시간의 흐름과 빗대어 표현하고 있다. 옛날에는 해가 지면 벚꽃 구경이 어려웠을 테지만 요즘에는 벚꽃 주위로 조명을 밝혀 밤 벚꽃 놀이를 할 수 있다. 격세지감. 물론 현대라고 말하는 오늘도 곧 옛날이 되겠지만.

 

 

해 질 녘이여

반딧불이에 젖는

얇은 다다미

 

잇사의 시는 공감각적 표현이 두드러진다. 이 시 역시 해질녘과 반딧불이를 시각적 언어로 볼 수 있고, 젖는다를 촉각적 이미지를 볼 수 있어 공감각적 이미지 표현이 잘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창으로부터 노을이 들어오고 반딧불이가 다다미를 기어가는데 그 기어가는 흔적에 다다미가 젖는 것처럼 보인다.   

 

 

산이 불타네

눈썹에는 주르르

밤비 내린다

 

이른 봄, 멀리서 불을 놓은 산비탈의 논이 불타고 있다. 그런데 느닷없이 비가 내린다. 불구경을 하며 비를 맞는 모습을 찰나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연꽃 있으나

이(虱)를 비틀어

버릴 뿐이네

 

일본식 정원에 연꽃이 활짝 피어 있다. 이를 때는 대개 정원 주인을 칭찬하며 정원에 찬사를 보내거나 시를 읊는다. 연꽃 핀 정원을 칭찬하며 주인에게 찬사를 늘어놓는 동시에 자신은 이를 잡을 뿐이라며 몸을 낮춘다. 존비(尊卑) 대칭으로 시적 극대화를 꾀한 작품이다.

 

 

조용함이여

호수 밑바닥에

구름 봉우리

 

너무나 맑은 호수에 시간이 정지한 듯한 정밀함이 깃든다. 호수 밑바닥에는 하늘에 뭉게뭉게 핀 흰 구름이 비친다. 구름은 마치 산봉우리처럼 그림자를 드리웠다. 제자의 시에서 싯귀 대부분을 훔쳐왔다는 평을 듣는 시다. 

 

 

여름 산에

기름기가 도는

밝은 달이여

 

여름, 울창한 산 위에 달이 떠 있다. 달의 표면도 무엇을 잘 먹었는지 반들반들 기름기가 도는 듯하다. 나무로 울창하고 빽빽한 여름 산과 그 위에 뜬 달을 기름기가 돈다는 시각적이며 촉각적인 이미지로 결합하였고, 동시에 매우 유머러스하고 활달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번개로구나

무심코 있기만 한

나의 얼굴로

 

가을날,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앉아 있는데 천둥소리가 없는 마른번개가 내 얼굴 바로 앞으로 내리친다. 나는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욕심도 없다. 그냥 무심코 번개를 맞이할 뿐이다.

 

 

때리지 마라

파리가 손 비비고

발을 비빈다

 

파리의 모습을 생동감 있고, 유머러스하게 표현한 시다. 파리가 용서를 빌고 있으니 때리지 말자. 생명존중!

 

 

새벽달이여

아사마(淺間)의 안개가

밥상을 긴다

 

달이 아직 하늘에 남아 있는 이른 새벽, 산골짜기 여행지에서 밥상을 마주 앉았는데, 새벽안개가 흘러 마치 밥상을 기어가는 듯하다.

안개가 밥상을 긴다는 문학적 발상이 시인의 품격과 고도로 숙련된 기교를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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