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을 생각하다> : 사랑과 죽음의 화해 ― 오르페우스의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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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파트리크 쥐스킨트 <사랑을 생각하다> : 사랑과 죽음의 화해 ― 오르페우스의 실패

by 브린니 2020. 9. 30.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사랑을 생각하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에서 인용한 글에서부터 시작한다.

 

어느 누구도 그것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을 때는 나는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 그것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것에 대해 설명을 하려하면 나는 더 이상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고백록』

 

쥐스퀸트는 어떤 주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할수록 오히려 더 알 수 없는 미궁에 빠져드는 미스터리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시간>에 대한 성 아우구스투스의 발언은 사랑에 관해서도 어느 정도 유효해 보인다. 즉 우리가 사랑에 대해 생각을 덜 할 때에는 그것이 확실해 보이는 반면, 막상 사랑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점점 더 커다란 혼란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쥐스퀸트는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또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빠져 있는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없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느낄뿐 그것을 설명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이 그것에 말할 수도 없다. 사랑에 대한 느낌이 없는 상태에서 사랑을 이론적으로 정의하는 것처럼 사랑과 무관한 것도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이미 말해진 수많은 사랑의 정의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에 관한 정의는 늘 어떤 창조성을 띨 수밖에 없다.

 

쥐스퀸트는 이를 두고 “정의를 내린다는 것은 일반화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보편적인 것과 구별되는 차별점을 찾는 것”이라고 말한다.

 

첫 번째로 쥐스퀸트는 사랑으로 번역되는 ‘에로스’에 대한 정의를 찾는다.

 

소크라테스가 『향연』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여인이라고 찬영하고 있는 디오티마는 <에로스는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창조적인 잉태와 분만>은 인간에게 불멸성을 부여한다. 왜냐하면 죽음을 넘어서까지 지속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속에서의 잉태와 분만>이라는 것은 우리 인간과는 다른 신적인 특성에 대한 동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쥐스퀸트는 사랑이란 테마가 원시시대부터 지금까지 종교적인 성역으로 남아 있다고 지적한다. 사랑이 현실적인 것을 넘어서 고차원적이고 숭고한 어떤 것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의 정의는 우리 인간이 늘 하는 행위인 사랑을 초과하는 것일 수 있다.

 

쥐스퀸트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젊은 남녀 커플들의 애정행각과 마찬가지로 17살이나 많은 70대 여성과 50대 남성의 사랑 역시 주위 사람을 아랑곳하지 않는 둘만의 마주보기를 실행하고 있다는 예를 들면서 사랑의 세속성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어느 70대 노작가가 호텔에서 만나 젊은 20대 종업원 남자에게 빠진 이야기를 하는데 이 노작가는 종업원에게 접근하지 못하는 자신의 욕망 때문에 괴로워했으며 이 사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종업원이 쓴 짤막한 편지에 뛸 듯이 기뻐했으며 후에 이를 작품으로 옮겨 놓는다는 이야기를 한다.

 

쥐스퀸트는 젊은 커플들의 사랑은 동물적인 에로스이며 나이든 커플의 사랑은 착각에서 빚어지는 고갈되는 에로스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작가의 사랑에 대해서는 “그 사랑에는 도취가 있고, 사랑하는 사람의 아름다움 속에서 성스러움을 보고 있으며 뭔가 창조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그 사랑은 불멸성을 추구하고 있고, 또 실제로 작가의 작품을 통해 불멸에 도달한다”고 말하고 있다.

 

 

사랑에 빠지면 대부분 얼이 빠진 듯한 모습을 띤다. 몹시 흥분해 있거나 넋이나 멍하니 앉아 있거나 아니면 실실 웃으며 돌아다닌다.

 

쥐스킨트는 사랑의 빠진 사람의 실제 모습을 통해 사랑 자체의 정의를 내리고 있다.

 

평균 이상의 지적인 사람조차 어리석은 짓을 하고, 어리석은 생각을 하고, 어리석은 내용을 써내려 간다.

사랑이 사람을 얼마나 멍청하게 만들 수 있는지

사랑에 빠진 사람과는 합리적인 토론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연인에 대한 사랑 이외에는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길은 텅 비어 있다.

한때 그들이 가지고 있던 재치, 지성, 활기, 호기심 그리고 신중함은 사라져 버렸다.

성스러운 뭔가를 보고 있다고 확신하는 죽은 자의 시선처럼 그들에게 남아 있는 것은 멍청한 표정뿐이다.

사랑은 언제나 이성의 상실, 자포자기, 그로 인한 미성숙함이라는 대가를 치러야만 하는 것이다.

 

커플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대개 곱지 않은데 왜냐하면 그들이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신들에게만 집중하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한 쌍의 연인은 자주 사회적으로는 이방인이 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상대방에게만 쏠려 있고, 자신들에게 자족하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을 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도 한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사랑은 인간이 줄 수 있고, 인간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쥐스킨트도 인정하고 있다.

 

곧이어 쥐스킨트는 사랑이 죽음과 관계있음을 이야기한다. 사랑 때문에 죽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데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특이한 케이스가 있는데 바로 오르페우스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사랑의 추구와 발견(2005)>이라는 시나리오를 발표하는데 이 시나리오는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오르페우스의 사랑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랑을 생각하다>는 이 영화의 일종의 해설서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책이다.

 

오르페우스는 사랑하는 아내 에우리디케가 독사에 물려 죽자 아내를 되찾기 위해 저승으로 내려간다. 오르페우스는 음악으로 지옥을 지키는 개를 물리치고, 하데스와 그의 아내 페르세포네 역시 탄복시키고 드디어 아내를 구해 지상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지상에 닿기 전에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잊고 뒤를 돌아다보다가 아내를 잃고 만다. 상심한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만을 노래하다가 디오니소스 추종자들에게 온몸이 찢겨 죽고 만다. 그런데도 목이 잘린 채 얼굴만 남은 오르페우스는 사랑을 노래하며 떠돈다.

 

쥐스퀸트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는 그 이전의 어느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일, 죽은 사람들로부터 자신의 아내를 다시 되찾아오는 일을 해냈다.

그리고 자신의 행운에 도취되어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르페우스는 예술가이다. 그 역시 자신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어떤 오페라 가수도 청중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계속 노래할 수는 없다.

그것은 예술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다.

자신의 예술이 청중에게 어떻게 반영되는지를 볼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야 한다.

뒤를 돌아봐서는 안 된다는 조건과 어쩌면 이것이 처음부터 속임수였는지도 모른다(아내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이 신들의 속임수일지도 모른다)는 이중의 의혹에 시달리는 오르페우스는 사실 놀랍도록 오래 그것을 견딘다.

그러나 몇 걸음만 더 가면 지상 세계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에 도달했을 때 그는 자제력을 잃어버린다.

 

오르페우스가 고개를 돌렸을 때 거기 아내가 있었고, 그것이 그들을 저승과 이승으로 분리시켰다.

 

쥐스퀸트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이유가

첫째 음악가로서의 도취와 허영심 때문이라는 엉뚱하지만 놀라운 해석을 내린다. 노래하면서 청중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예술가의 운명과 같은 것 때문이라는 것이다.

 

둘째 인간에게 갖은 속임수를 쓰는 신들이 자신에게도 아내를 돌려주겠노라고 말했지만 그것이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불신 때문이라는 것이다.

 

쥐스킨트는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해석을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고 있다.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는 여전히 우리를 감동시킨다. 왜냐하면 그것은 좌절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의 수수께끼 같은 두 개의 근원적 힘을 서로 화해시키려는 노력, 두 힘 중에서 더 강한 힘을 약한 힘과 화해시키려는 시도는 결국에는 끝이 난다.

 

실패. 아마도 사랑은 실패하는 것이 아닐까.

 

사랑의 정의 역시 인간은 사랑에서 늘 실패하고 만다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사랑에 관한 정의 역시 언제나 실패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쥐스킨트가 언급하듯이 사랑에 관해서도 죽음에 대해서도 실패하지 않는 사람은 오직 나사렛 예수가 아닐까.

 

왜냐하면 메시아 나사렛 예수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죽었으며 또 그 사람들을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다시 죽음에서 부활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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