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언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 보는 것의 즐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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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다리언 리더 <모나리자 훔치기> : 보는 것의 즐거움

by 브린니 2020. 9. 29.

 

당신은 오랜만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 그런데 전시회장으로 들어선 순간 깜짝 놀라서 다시 되돌아 나오고 만다. 전시장을 잘못 찾아온 걸까? 아니다. 분명 여기가 맞는데, 하고 다시 들어선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전시장은 텅 비어 있다. 그림이 걸려 있어야 할 벽은 모두 하얗게 비어 있다. 아, 이게 무슨 조화람!

 

이 전시회의 이름은 「도난당한 모나리자」이다. 사실 이런 전시회는 없다. 그냥 상상으로 만든 것이다.

 

그러나 모나리자는 도난당한 적이 있다.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전 세계에 모나리자라는 그림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다리안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에는 모나리자 도난사건을 다루면서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피고 있다. 책의 도입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11년 8월 21일 아침 루브르 박물관 모나리자 그림이 도난당했다. 24시간이 지나서 도난 사실이 알려졌다. 8월 21일은 정기 휴관일이었다. 루브르는 순식간에 경찰 본부가 되었다. 경찰은 박물관 내부를 샅샅이 뒤졌고, 휴가를 떠났던 임직원들도 모두 돌아왔다. 신문 1면은 모두 이 사건으로 도배되었다. 모나리자 그림은 뉴스 영화에도, 초콜릿 상자에도, 우편엽서에도, 간판에도 등장했다. 한때 이 그림이 걸려 있던 텅 빈 자리를 보려고 군중들은 루브르 미술관으로 몰려들었다. 구경꾼 대부분은 루브르에 와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모나리자를 본 적도 없었다.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도처에 있었다. 그러나 루브르 박물관에는 없었다. 왜 사람들은 텅 빈 공간을 쳐다보러 갔을까? 사람들은 그림이 아니라 텅 빈 공간을 보려고 몰려들었다.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즉 예술작품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그런데 2년 뒤 모나리자 그림을 훔친 범인이 체포되고 모나리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왔을 때 사람들은 모나리자가 도난당했을 때보다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고, 구경꾼들도 별로 모여들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모나리자는 도난당하기 전엔 그렇게까지 유명한 그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림이 도난당하자 모두들 모나리자, 모나리자하면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도처에 모나리자의 모사품이 내걸렸다. 모나리자는 하나의 그림을 넘어 모든 그림, 회화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모나리자를 보려고 루브르 박물관에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이 본 것은 텅 빈 벽뿐이었다. 모나리자가 결려 있었던 벽. 과연 이 벽이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모나리자가 있었던 장소라는 것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 것일까.

 

어쨌든 사람들은 박물관으로 몰려들었다. 모나리자가 없는데 모나리자를 보겠다고 찾아온 것이었다. 모나리자가 정말 도둑맞았는지 확인하려고 몰려온 것인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미술품을 보러 온 것이 아니라 범죄현장을 보려고 온 것일까. 그러나 거기엔 그 어떤 범죄의 흔적도 없었다. 그저 텅 빈 벽뿐이었다.

 

관람객들은 이전에 루브르를 거의 찾아온 적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사실 그들은 모나리자가 다시 돌아왔을 때 거의 찾아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보러 박물관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정말 무엇을 보러 간 것일까?

 

다리언 리더는 이 문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보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무엇을 보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기 위해 줄을 서는가?

우리는 무엇을 보기를 욕망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그림이 아니라 그림이 사라진 것을 보려고 루브르 미술관으로 몰려든, 20세기 예술의 또 다른 거대한 집단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군중들이 보려고 몰려든 것은 <모나리자>가 사라지고 남은 텅 빈 공간이었다. 즉 예술작품이 거기 있기 때문이 아니라 거꾸로 거기 없기 때문에 보러 간 것이다.

 

 

뭔가를 잃어버리고 난 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그것이 있었던 장소를 찾는 것은 아주 당연한 일이다. 마치 모나리자는 그런 방식으로 보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모나리자는 도난당한 뒤로 아주 유명해져서 수많은 복제품으로 다시 태어났다.

 

<모나리자>처럼 대대적으로 복제되면 원본에 독특한 지위가 부여된다. ‘진짜’로서 즉 셀 수 없이 많은 복사본들과 각종 변형에 대한 최종적인 지시 대상으로서 원본은 신비한, 잃어버린 대상이라는 특징을 갖게 되는 것이다.

 

잃어버린 대상이란 끝없는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계속해서 미련이 남고, 아쉽다. 아예 없던 것보다 잃어버린 것은 더 큰 결핍감을 느끼게 할 수도 있다.

 

<모나리자>도 높이 평가되었지만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높은 평가가 영구히 확고부동한 것이 되었다. 하나의 상징이 되려면 사라져야만 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물건을 찾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그것의 진가를 깨닫지 않는가?

그것이 거기에 없기 때문에 소중해지는 것이다.

 

 

다리언 리더는 보는 것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면서 우리의 시선이 타인의 시선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의 시선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역동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 우리가 보는 것과 우리가 보는 장소는 부분적으로 다른 사람이 보는 것과 보는 장소에 의해 결정된다. 세계 속으로 들어오는 바로 그 순간,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사물을 볼 수 있기 전에 다른 누군가의 시선의 대상이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보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대상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무엇을 보는 순간, 우리가 보는 대상과 우리를 보고 있는 제3의 눈이 함께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시선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시선과 연관되어 있다.

내가 두 눈으로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은 무엇을 보고 있을까 하는 질문과 뒤섞이게 된다.

화랑을 찾는 사람들이 종종 자기가 보고 있는 작품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볼까 생각한다.

타자의 시선이 우리 자신의 이미지 속으로 짜여져 들어온다.

 

다리언 리더는 본다는 것은 보여지는 것과 함께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초상화를 볼 때 초상화 속의 사람 역시 우리를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모나리자>를 훔친 범인 페루지아는 <모나리자> 앞을 지나가는 순간 마치 모나리자가 자기를 향해 미소를 짓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사물을 볼 때 그 사물 그대로 보지 않고 그 사물의 이미지를 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다이아몬드는 그냥 다이아몬드로서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미지로서 보여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엇을 볼 때 그것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것에 부과된 어떤 이미지를 보고, 그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사로잡은 이미지의 힘.

이미지들은 우리를 특정한 틀에 넣어 만들고, 꼼짝 못하게 고정시키고, 우리를 사로잡기도 하며, 우리를 소외시킨다.

 

 

이미지의 가치는 보는 사람의 시선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 있는 위치에 의해 결정된다.

다리언 리더는 이렇게 질문한다.

 

(도난당한 모나리자가)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은 채 고독한 상태로 존재했더라도 <모나리자>는 과연 회화였을까?

 

보는 것은 어떤 장소와 관계가 있다. 예를 들어 건축 공사장을 지날 때 흰 벽에 구멍이 나 있고, 거기 이렇게 쓰여 있다. “들여다보지 마시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구멍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거기 아무것도 없다. 들여다보지 말라는 금지 명령이 우리의 욕망을 부추기고 구멍을 들여다보지만 거기에 볼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냥 구멍이 나 있을 뿐이다. 우리는 그저 구멍을 들여다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가 보려고 한 것은 구멍이 아니다.

 

모나리자가 도난당한 뒤 모나리자를 보러 몰려온 구경꾼들은 텅 빈 벽만 보았다. 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모나리자였다. 그러나 그것은 도난당한 뒤였다. 모나리자가 거기 있었을 때는 아무런 호기심도 갖지 못한 그들이 도난당한 뒤에는 모나리자가 미치도록 보고 싶어 모나리자가 있던 장소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텅 빈 벽을 보았다. 모나리자는 거기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본 것은 모나리자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못 본 것이 아니다. 그들이 본 것은 모나리자가 거기 있었고, 지금은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본 것이다. 없는 것을 본다는 것은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나리자는 아무에게도 눈에 띄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어떤 이미지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구경꾼들은 모나리자가 돌아왔을 때 굳이 확인하러 오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모나리자가 거기 있었다는 것을 확인했으며(역설적으로 모나리자가 거기 없다는 것을 확인함으로써), 없는 모나리자까지 보고 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보고 싶은 것, 혹은 본 곳은 모나리자의 이미지였지 모나리자 그 자체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텅 빈 벽을 보았을 뿐이지만 부재하는 모나리자와 조우했다. 모나리자는 거기 없음으로써 사람들의 머릿속에 어떤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것이 모나리자를 세계 최고의 명작으로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모나리자를 그냥 모나리자를 보지 않고, 모나리자 너머의 어떤 것을 동시에 보게 되는 것이다. 이제 모나리자 이상의 어떤 것이 모나리자의 이미지이며(원래 모나리자가 지녔을 것으로 예상되는 것이 아닌)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사람들은 무엇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이미지를 보려고 한다. 그 이미지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이미 이미지가 우리를 보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그것은 반드시 봐야만 하는 욕망의 대상이 되고, 우리는 그것이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그것을 꼭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떤 이미지란 내가 만들어낸 것이라기보다는 타인들이 만들어낸 것을 받아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지는 개인의 것이 아니라 타자들의 것이다.

 

도난당한 모나리자에 열광한 것 역시 모나리자가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어떤 이미지, 그리고 그 이미지가 환기하는 어떤 것들이 또 다른 이미지를 재생산하면서 지울 수 없는 강력한 어떤 이미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머릿속을 떠도는 이미지를 좇아 루브르 박물관으로 달려와 텅 빈 벽을 바라보면서 부재하는 모나리자의 이미지를 소비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는가?

대부분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본다.

 

그냥 보는 것 자체가 주는 어떤 즐거움을 향유할 뿐이다.

대상이 중요한 것이라 ‘응시’가 중요한 것이다.

 

응시 ― 그저 멍하니 바라보기!

 

 

다리언 리더의 <모나리자 훔치기>는 도난당한 모나리자를 모티브로 우리의 시선이 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보여지는 것, 보이는 것 너머에 있는 어떤 이미지 등등 보는 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흥미로운 테마를 철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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