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기욤 아폴리네르 <황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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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기욤 아폴리네르 <황혼>

by 브린니 2020. 9. 29.

황혼

―마리 로랑생 양에게

 

 

해 저무는 초원 위에

죽음의 그림자 스쳐가고

한 여자 곡예사가 옷을 벗은 채

연못 속에 제 모습을 비춰 보네

 

황혼녘의 돌팔이 의사는

한판 벌어지는 마술로 허풍을 떨고

침침한 하늘엔 총총히 박혀 있네

우윳빛 같은 창백한 별들이

 

하얗게 분장한 어릿광대

단 위에 올라가 관중들에게 인사하네

방랑길에서 돌아온 요술쟁이

또한 요정과 마술사

 

팔을 벌려 별 한 개 떼어내서

그는 어루만진다

또한 목매단 사람이 두 발로 박자 맞춰

심벌즈를 꽝꽝 울리네

 

맹인이 예쁜 아이를 달래고

사슴은 새끼들과 함께 지나가고

난쟁이는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네

키 큰 어릿광대가 더욱 커지는 것을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프랑스, 1880-1918)

 

 

【산책】

 

저녁은 불안한 시간이다.

해가 지고,

산과 들과 강은 붉게 물들고,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죽음의 그림자 스쳐가고

밤은 태양의 죽음이고, 빛의 죽음이다.

밤이 오기 전 저물녘은 세상을 붉게 물들면서 어둠이 오기 전 오묘한 빛의 조화를 부린다.

 

석양이 번지는 들판에 서커스단이 왔다.

 

우윳빛 같은 창백한 별들이

 

하얗게 분장한 어릿광대

 

흰 별과 하얀 어릿광대의 얼굴이 어우러지고,

 

또한 요정과 마술사

 

팔을 벌려 별 한 개 떼어내서

 

마술사는 별을 따다 주겠다는 사랑의 거짓말을 완성한다.

 

난쟁이는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네

 

키 큰 어릿광대가 더욱 커지는 것을

 

서커스단에는 거꾸리와 장다리가 있다.

황혼녘에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고 키가 더 커 보인다.

 

이 시는 노을이 지는 시간

초원에 자리를 편 곡마단의 풍경을 위트 있게 그린다.

 

한낮이 저물어 가는 저녁, 밤과 어둠이 오기 전

한바탕 공연이 끝나고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현대인들도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건물 사이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본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하지만 동시에 쉼을 얻는 시간이다.

 

밤은 어둠 속으로 모든 사람과 사물을 감춘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

 

바로 그 시간 앞에서 묘한 불안에 떠는 사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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