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마리 로랑생 양에게
해 저무는 초원 위에
죽음의 그림자 스쳐가고
한 여자 곡예사가 옷을 벗은 채
연못 속에 제 모습을 비춰 보네
황혼녘의 돌팔이 의사는
한판 벌어지는 마술로 허풍을 떨고
침침한 하늘엔 총총히 박혀 있네
우윳빛 같은 창백한 별들이
하얗게 분장한 어릿광대
단 위에 올라가 관중들에게 인사하네
방랑길에서 돌아온 요술쟁이
또한 요정과 마술사
팔을 벌려 별 한 개 떼어내서
그는 어루만진다
또한 목매단 사람이 두 발로 박자 맞춰
심벌즈를 꽝꽝 울리네
맹인이 예쁜 아이를 달래고
사슴은 새끼들과 함께 지나가고
난쟁이는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네
키 큰 어릿광대가 더욱 커지는 것을
―기욤 아폴리네르 Guillaume Apollinaire (프랑스, 1880-1918)
【산책】
저녁은 불안한 시간이다.
해가 지고,
산과 들과 강은 붉게 물들고,
어둠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죽음의 그림자 스쳐가고
밤은 태양의 죽음이고, 빛의 죽음이다.
밤이 오기 전 저물녘은 세상을 붉게 물들면서 어둠이 오기 전 오묘한 빛의 조화를 부린다.
석양이 번지는 들판에 서커스단이 왔다.
우윳빛 같은 창백한 별들이
하얗게 분장한 어릿광대
흰 별과 하얀 어릿광대의 얼굴이 어우러지고,
또한 요정과 마술사
팔을 벌려 별 한 개 떼어내서
마술사는 별을 따다 주겠다는 사랑의 거짓말을 완성한다.
난쟁이는 슬픈 표정으로 쳐다보네
키 큰 어릿광대가 더욱 커지는 것을
서커스단에는 거꾸리와 장다리가 있다.
황혼녘에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나고 키가 더 커 보인다.
이 시는 노을이 지는 시간
초원에 자리를 편 곡마단의 풍경을 위트 있게 그린다.
한낮이 저물어 가는 저녁, 밤과 어둠이 오기 전
한바탕 공연이 끝나고 피곤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시간
현대인들도 직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건물 사이를 붉게 물들이며 지는 해를 본다.
저녁은 하루 중 가장 피곤하지만 동시에 쉼을 얻는 시간이다.
밤은 어둠 속으로 모든 사람과 사물을 감춘다.
아무것도 없는 시간,
바로 그 시간 앞에서 묘한 불안에 떠는 사람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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