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환상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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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아르튀르 랭보 <나의 방랑 (환상곡)>

by 브린니 2020. 9. 25.

나의 방랑 (환상곡)

MA BOHÈME (Fantaisie)

 

 

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내 외투 또한 이성적으로 되었지.

하늘 밑을 걸었고, 뮤즈여! 나는 그대의 충복이었네.

아아! 내 얼마나 찬란한 사랑을 꿈꾸었던가!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 꿈꾸는 엄지동자, 나는 내 길에서 낱알처럼

시의 운을 땄다네.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드럽게 살랑살랑대고

 

나는, 길섶에 앉아, 귀 기울였네,

이마에 내리는 이슬방울들이, 힘 돋우는

술처럼 느껴지는, 이 9월의 상큼한 저녁에,

 

기이한 그림자들에 둘러싸여 운을 밟으며,

칠현금이라도 켜듯, 한 발을 가슴 가까이 들어 올려,

찢어진 신발의 고무줄을 나는 잡아당겼네!

 

―아르튀르 랭보 Arthur Rimbaud (프랑스, 1854–1891)

 

 

【산책】

한때 무전여행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가 언제였던가.

 

돈 한 푼 없이 걸어서 하늘까지?

 

걷고, 또 걷다가 쉬고 싶을 때면 큰 나무 그늘에 기대 쉬다가

다시 걷고 걷다가 배가 고프면 길갓집에 들러 배고픔을 달래고

 

다시 걷고 걷다가 밤이 오면 불빛을 찾아들어가 어느 인심 좋은 집에 몸을 맡긴다.

이런 일들이 가능했던 어느 한때가 있었다.

 

과연 그런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지금이라면 결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 옛날이여!

 

아르튀르 랭보는 그 사람 자체가 방랑이라는 말과 너무 잘 어울린다.

어린 시절 혹은 젊은 시절 그는 세상과 길 위에서 떠돌았을 것 같은 느낌이다.

 

아프리카에서 죽었다는 전설이 너무도 잘 어울리는 시인.

시인이라는 신분과 무기밀매상이란 직업?

썩 잘 어울리는

악동 같은 방랑자의 면모.

 

프랑스 부르주아보다는 집시나 히피에 어울릴 듯한 외모와 삶.

한때 나이든 부르주아 남자 시인을 사랑했던 젊은 청춘.

짧은 시처럼 짧은 생애.

 

현대인들에겐 인생에서 방랑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이 거의 없다.

해외여행이나 캠핑이나 욜로,

이 모든 것은 돈이 꽤 든다.

 

가난하지만 여유 있고, 낭만으로 가득 찬 방랑이란 더 이상 할 수 없는 시대이다.

일부러 오지奧地를 찾아 빈손으로 떠나는 것은 왠지 의도적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온종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걷다가 아무데서나 잠들고,

밥 먹을 수 있는 그런 식의 방랑.

 

아무리 꿈꾸어도 이젠 결코 불가능한, 그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낭만!

시를 읽으면서 방랑을 대신한다.

 

나는 갔다네, 터진 주머니에 주먹을 쑤셔 넣고서.

내 단벌 바지에는 커다란 구멍이 하나.

내 여인숙은 큰곰자리.

내 별들은 하늘에서 부드럽게 살랑살랑대고

나는, 길섶에 앉아, 귀 기울였네,

이마에 내리는 이슬방울들이, 힘 돋우는

술처럼 느껴지는, 이 9월의 상큼한 저녁에,

 

방랑이 아니라면

9월의 저녁 혹은 밤,

가난한 밤에 깊은 산책을 나서자.

 

찢어진 청바지에

구멍 난 양말에

입술로 시를 퉁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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