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시 산책] 기형도 <오래된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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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명시 산책] 기형도 <오래된 서적>

by 브린니 2020. 9. 25.

오래된 서적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오랫동안 나는 곰팡이 피어

나는 어둡고 축축한 세계에서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질서

 

속에서, 텅 빈 희망 속에서

어찌 스스로의 일생을 예언할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들은 분주히

몇몇 안 되는 내용을 가지고 서로의 기능을

넘겨보며 서표(書標)를 꽂기도 한다

또 어떤 이는 너무 쉽게 살았다고

말한다, 좀 더 두꺼운 추억이 필요하다는

 

사실, 완전을 위해서라면 두께가

문제겠는가? 나는 여러 번 장소를 옮기며 살았지만

죽음은 생각도 못했다, 나의 경력은

출생뿐이었으므로, 왜냐하면

두려움이 나의 속성이며

미래가 나의 과거이므로

나는 존재하는 것, 그러므로

용기란 얼마나 무책임한 것인가, 보라

 

나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모두

나를 떠나갔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그러니 누가 나를

펼쳐볼 것인가 하지만 그 경우

그들은 거짓을 논할 자격이 없다

거짓과 참됨은 모두 하나의 목적을

꿈꾸어야 한다, 단

한 줄일 수도 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기형도

 

 

 

【산책】

 

이사를 가려고 짐을 정리하면서 묵은 책들을 중고 서점에 판다.

 

책은 내용이나 중요도에 따라 값이 매겨지는 것이 아니라

책을 상태가 깨끗한지 밑줄이 없는지

 

책이 물에 젖었거나 곰팡이가 피거나

책의 재고가 많은지 적은지 등등에 따라

값이 정해진다.

 

책은 자신에게 매겨진 값을 인정할 수 있을까.

 

이 시에서처럼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값을 매길 수 있을까.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

 

과연 우리는 자기 자신의 영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자신의 영혼이 우울하든, 밝은 톤이든 상관없이

 

나는 존재하는 것,

 

우리는 존재에 어떤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기를 좋아한다.

하지만 그저 존재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족한 줄 알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 아닌가.

 

내가 살아온 것은 거의

기적적이었다

 

사실 그렇게 살지 않는가. 우리가 사는 것은 날마다 기적이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우리는

 

나는 기적을 믿지 않는다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잘난 맛에 살지 않는가.

아무렴 어떤가, 존재하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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