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 사랑에 관한 고급진 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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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리뷰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 사랑에 관한 고급진 담론

by 브린니 2020. 9. 20.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사랑과 관련한 단어들을 하나씩 제시하면서 사랑의 담론을 전개하고 있다.

 

사랑에 대한 말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오지만 사실 사랑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면서 사랑에 목숨을 걸고는 한다. 그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시인 쉼보르스카는 실제로 사랑 때문에 죽은 사람은 별로 없다고 시에 쓰고 있다.

 

사실 빈번히 죽을 것 같다고 말해지는 것이 사랑이지만 사랑 때문에 진짜로 죽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아마도 하림의 노래 가사처럼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은 서글픈 일이지만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바뀌는 것은 매우 자연스럽다.

 

책의 앞 부분에 제시된 단어 ‘부재 absence’에는 사랑하는 빠진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의 처분을 기다리며 자리에서 꼼짝 않고, 미결상태로 남아 있는, 한 구석에 내팽개쳐진 수화물마냥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자신은 사랑에 빠져 있는데 정작 상대는 미적거리며 아직 내 사랑의 범위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거나 혹은 내 사랑을 거부하고 있거나 아니면 무관심한 것인데 이런 사랑의 부재는 먼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에겐 매우 가혹한 것이 되고 만다.

 

‘근사한 adorable’이란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특이함을 이름 짓지 못해 조금은 바보 같이 다만 “근사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전부가 미학적인 환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그 사람이 완벽하다는 데 대해 찬미하며, 또 그렇게 완벽한 사람을 선택했다는 데 대해 자신을 찬미한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나는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내 욕망의 특이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라캉은 사랑이란 그 사람에게 없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내게 없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나는 그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는 내게 없는 것을 발견하는데 바로 그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그는 내게 선량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굳게 믿지만 나는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그에게서 늘 긍정적인 마음과 태도를 보지만 그는 자신이 고뇌에 차서 부정적이 생각과 싸우느라 힘겨워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내게서 그만이 볼 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나는 그에게서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이렇게 사랑은 내가 욕망하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달리 매우 특이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람들은 내가 어떤 대상에 몰두할 때 대개는 너 좀 특이하구나, 하는 반응을 보인다. 왜냐하면 다들 꽂히는 대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사랑은 배타적이다. 누구는 되지만 누구는 결코 안 되니까 말이다. 그래서 사랑에는 항상 ‘왜? pourquoi’라는 질문이 따라 온다.

 

그 사람은 되는데 왜 나는 안 될까?

그는 도대체 무엇을 원하는가?

 

‘질투 jalousie’ 역시 사랑의 배타성에 빠지지 않는 단어이다. 질투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상대를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생기는 감정이다. 사랑은 오직 나와 너의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면 다른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질투하는 것은 관례적인 일이며, 질투를 거부하는 것이 오히려 법을 위반하는 일이다.

 

‘기다림 attente’은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가 되기 마련인 사랑의 시소에서 자주 발생하는 고뇌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다림은 하나의 주문이다. 나는 움직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다리게 하는 것은 모든 권력의 변함없는 특권이며 인류의 오래된 소일거리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마음 coeur’이다.

 

무시되든 거부되든 간에 한결같은 것은 마음이 선물의 대상이 된다는 점이다.

 

내가 사랑하는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마음이 전부이다. 이것이 사랑의 무상 제공이라고 할 수 있다. 돈을 살 수 없거나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마음이니까.

 

‘연민 compassion’ ― 사랑하는 사람이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불행하거나 위험에 처해 있다고 느끼거나 보고 알 때, 그에 대한 격렬한 연민의 감정을 느낀다.

 

연민이란 상대방의 형편과 처지를 전 인격적으로 이해하다는 뜻이며 서로의 신경과 신경이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매우 강렬한 감정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지극히 사랑하는 인간에게 보이는 감정 상태로 나타난다(히4:15). 이는 단지 감정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을 돕고, 구원하는 행위에까지 이르는 것을 뜻한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사랑하는 사람이 납치를 당하거나 큰 위험에 빠졌을 때 자기 목숨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것도 바로 이 연민의 감정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연민이란 사랑의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는 증표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해하다 comprendre’ 에서는 사랑에 빠진 사랑에 대해 이해하고 싶은 마음을 논하고 있다.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고 싶지만, 사랑 안에 있는 나는, 그것의 실존은 보지만, 본질은 보지 못한다.

 

나는 분석하고 싶고, 알고 싶고, 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말하고 싶다.

이 말은 나는 나를 이해하고, 나를 이해시키고 싶고, 나를 알리고 싶고, 포옹받게 하고 싶고, 누군가 와서 나를 데려가기를 바란다는 뜻이다.

 

사랑이란 결국 인격적으로 온전히 이해받고자 하는 욕망인 것이다. 사랑이란 기본적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것이니까.

 

손을 잡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기다렸던 시대가 있었다.

 

‘접촉 contacts’은 사랑의 시작점에서 혹은 깊은 사이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드는 데 중요한 터닝 포인트가 된다.

 

욕망하는 대상의 육체(살갗)와의 가벼운 접촉이야 말로 사랑을 시작하는 확실한 증표가 되기도 하고 관계가 깊어지는 계기를 마련한다. 접촉은 좀 더 깊은 육체의 언어를 유도하는 내적인 담론이다.

 

(손을 꽉 잡는 ― 수많은 소설의 얘깃거리가 되어온 ― 손바닥 안에서의 그 미세한 움직임, 비키지 않는 무릎,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소파의 등받이를 따라 늘어뜨린 팔, 그 뒤로 차츰차츰 다가와 기대는 그의 머리. 그것은 미묘하고도 은밀한 기호들의 천국이다 : 감각의 축제가 아닌 의미의 축제와도 같은 어떤 것.)

 

‘드라마 drama’ ― 사랑하는 사람은 연애소설을 스스로 쓸 수 없다. 사랑이 끝났을 때나 혹은 제3자가 받아쓸 때나 가능하다. 모든 소설은 이미 과거에 일어났던 사건에 대한 서술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삶의 사건이란 너무도 하찮은 것이어서 많은 노력을 하지 않고는 글쓰기로 옮겨질 수 없다. 쓰이면서 자신의 진부함을 드러내는 것을 쓰다보면 사람들은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사랑의 사건이란 내가 그 대상이었고, 후에 내가 반복하는(혹은 실패하는) 유일한 매혹이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내 개인적인 전설을, 내 작은 거룩한 이야기를 낭송하며, 이런 기정사실(모든 행위가 배제된, 방부제를 발라 응고된 듯한)의 낭독이 곧 사랑의 담론이다.

 

사랑의 ‘포옹 etreinte’은 한 순간,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는 이와의 완전한 결합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것처럼 보인다.

 

보듬는 것, 껴안는 것은 가슴과 가슴이 맞닿는 평화로운 행위이면서 에로스보다는 모성애를 연상케 하는 따뜻함을 선물한다.

 

사랑의 어려움이란 불타는 사랑이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토록 뜨거웠던 열정이 언젠가부터 조금씩 식더니 어느 날엔가는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흔히 말하는 콩깍지가 벗겨졌기 때문인가.

 

그럴 수도 있다.

이때 한 사람이 “더 이상 이런 식으로 계속 할 수 없어요”하고 말하면 정말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견딜 수 없는 것insupportable’ 에서는 바로 이런 시점부터 사랑의 인내심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합리적인 감정은 모든 것은 잘 되어가지만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지만 사랑의 감정은 잘 되어가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 그것이 지속된다는 것이다.

 

인내의 철학은 묵묵히 감내하고, 격렬한 감정을 느끼지 않으면서 그대로 존속하는, 또는 항상 얼이 빠진 채 결코 실망하지 않는 그런 상태로 시간을 견디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튕겨도 그 속에 있는 받침대 때문에 결국은 평정을 되찾는 것이다. 그 받침대의 이름은 사랑의 힘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사랑을 고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의 견디기 힘든 지겨움을 물리치고(혹은 그런 권태기에) 우리는 다시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되풀이해서 말해야 한다.

 

난-널-사랑해 Je-t-aime. 사랑의 고백이나 선언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사랑의 외침이 되풀이되는 발화를 가리킨다.

 

첫 번째 고백을 하고 난 후의 난-널-사랑해란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것은 텅 빈 것처럼 보이기에 약간은 수수께끼 같은 과거의 메시지를 다시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계속해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하는 약속이다. 자신의 사랑이 끝나지 않았다는 다짐으로서 상대를 사랑하는 마음을 되살리고, 반복적으로 사랑을 선언함으로써 자신과 상대가 함께 사랑의 지속 가능함을 확인해야 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공허하게 들릴지라도 끊임없이 사랑한다고 외침으로서 인내의 철학을 더 단단하게 하고, 사랑의 오뚝이 인형이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사랑의 힘을 더 강화해야 하는 것이다.

 

사랑은 사랑을 말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며 사랑을 잘 알고 잘 이해하고 있다고 해서 더 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엔 자기감정에 충실하고, 그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감정이 행위로, 행위가 확신으로 나아갔을 때는 그 확신을 끝까지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으로 시작했다가 믿음으로 완성된다. 사랑은 배신하지 않는 약속이며 믿음이다. 설령 사랑이 배신할지라도 그 사랑이 헛된 것이 아니었다면 용서까지 포함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은 매우 고급스런 사랑의 담론들을 단어를 풀이하는 식으로 짤막하게 서술하면서 사랑에 대한 우리의 생각을, 혹은 사랑의 추억을 상기한다.

 

가을이다. 사랑하기 좋은 계절이다. 오늘 저녁엔 베토벤의 사랑의 노래 Ich Liebe Dich를 들으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손편지를 쓰면 어떨까.

 

https://www.youtube.com/watch?v=AAptfMOT83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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